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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아이로 살지 못한 당신...힘들었다 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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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중학교 3학년 때 간경화로 돌아가셨어요. 그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봤고, 임종도 제가 했죠. 마지막 순간, 눈물을 흘리시며 눈도 못 감고 가신 게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술만 안 드시면 세상에 둘도 없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술만 드시면 그렇게 엄마를 때리셨어요. 저와 남동생은 엄마와 함께 도망 다니다가 아빠가 잠들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죠.
견디다 못한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엄마 떠나시던 날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제가 “아빠 깨기 전에 빨리 가라”고 했었어요. 엄마는 울면서 나가셨고, 중학생인 저와 세 살 아래 남동생만 남아 아빠의 주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끼니도 참 많이 걸렀죠. 술 안 드시는 날엔 너무 자상하고 좋은 아빠인데, 왜 엄마에게만 그러셨던 걸까요.
간경화로 며칠째 누워만 있던 아빠는 돌아가시기 전날 삶은 감자랑 고등어찜을 해먹자고 하셨어요. 저는 또 술 먹고 하는 소리인가 싶어 짜증을 냈죠. 싫다고, 그냥 잘 거라고 말하고 누웠는데, 그게 마지막 대화였어요. 누워만 있던 아빠가 바지에 변을 본 것 같아 가까이 사는 둘째 이모께 연락했더니 이모부랑 오셔서 “준비해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두 분이 어디론가 나가서 전화를 하시는 동안, 숨을 헐떡이던 아빠는 어린 남동생과 제 앞에서, 눈도 감지 못한 채, 눈물 한 방울 흘리시더니 그대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말이죠. 저는 눈물이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슬프다기보다는 해방감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이제는 끝난다….’ 이모 연락 받고 오신 엄마는 많이 우셨는데, 저는 이 모든 상황이 남의 일처럼 실감나지 않았어요.
아빠 장례가 끝나고 엄마랑 같이 살게 됐지만, 그 생활도 녹록하진 않았죠. 그래도 세 식구가 마음 맞춰서 살려고 노력했어요. 세상 누구보다 서로 아끼고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이가 들고 힘든 순간마다 덤덤히 보낸 아빠가 떠오르는 걸까요. ‘마지막에 그 말을 들어줄걸.’ 내 평생 그 음식들은 먹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빠가 술 먹을 때마다 ‘제발 없어지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을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아빠가 누워만 있었는데 119에 신고했더라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죠.
나이가 드니 우리 아빠도 외로웠던 것 아닐까, 술만 먹으면 엄마를 찾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찾고, 그게 다 외로워서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술 사오라며 울고 소리지르던 아빠. 내가 그렇게 만든 것 아닐까, 죄의식이 떨쳐지지 않네요. 내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우리 가족이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땐 나도 어렸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살면서 ‘나도 아빠라는 울타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몰라요.
다섯 살과 32개월인 연년생 두 딸을 낳아 키우면서 우울증이 왔습니다. 둘째 낳고 생긴 우울증세를 제대로 극복하지 않고, ‘괜찮다, 괜찮다’ 하며 혼자 삭였던 것이 점점 심각해져 아이들에게 폭발할 때가 있어요. 특히 큰 딸이 저를 닮아 예민해서 너무 힘듭니다. 옷을 입으면 양손 소매와 바지 밑단을 한 치 오차 없이 똑같은 두께로 접어야 하고, 구두나 샌들을 신으면 ‘찍찍이’ 붙이는 모양도 같아야 해요. 짜증을 참지 못하고 감정조절도 못하는 아이가 또 맘은 여리고 겁은 많아요. 유치원에서도 실수하면 안 된다며 너무 잘하려고만 합니다. 물도 흘리면 안 되고, 선생님이 하라는 건 꼭 해야 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얘기하지 않고 속으로 혼자 담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밀거나 때려도 가만히 있고요.
요즘 아이가 잠자리에 누우면 누군가랑 얘기하듯 중얼중얼해요. 빨리 잤으면 좋겠는데 자꾸 그러니까 ‘빨리 자라. 자꾸 말하지 말아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게 돼요. 혼이 나면 제 얘기도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안아줘, 안아줘” 하는 아이를 밀치거나, 방에 혼자 둔 채 “안 울 거면 나오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후회하면서도 저 스스로 감정이 조절되지 않아요. 괜히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몸이 피곤하면 TV를 틀어주고 혼자 방에 누워 있던 적도 많습니다. 혼자 있고 싶었던 것 같아요.
친정엄마는 애기들 낳을 때도 옆에 있어 주셨고, 아이들도 참 예뻐하세요. 제가 힘든 얘기를 하면 “왜 그런 생각을 하냐. 니가 정신차려야 애들을 잘 보지” 하십니다. “너도 밖으로 좀 돌아다녀라. 애들이 너무 우물 안 개구리다” 하시기도 하고요. 제가 용무가 있지 않으면 밖에 나가지를 않거든요. 사실 엄마한테 힘들다는 얘기를 솔직하고 자세하게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 어린 애기인 첫째한테 언니 역할을 강요한 게 미안해요. 빨리 먹어, 빨리 씻자, 빨리 나가자, 만지지 마라, 들어가지 마라, 소리내지 마라, 늘 그런 말들만 했어요. 안아달라는 아이 밀쳐내고, 우는 아이 혼자 방에 두고, 그러고 나면 너무 미안해서 같이 울고 최악이었죠.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큰아이 예민한 게 다 내 탓인 거 같고…, 저는 참 나쁜 엄마입니다.”(박은하씨ㆍ가명, 36세, 주부)
“은하씨. 만일 제가 은하씨 옆에 있다면, 꼭 안아주고 싶어요. 손도 따뜻하게 잡아주고 싶고요. 가슴이 아파서 말이 잘 나오질 않네요.
은하씨는 페어렌털 차일드(parental child)였어요. 부모 같은 역할을 하는 자녀였죠. 엄마가 집을 떠난 후 엄마 역할을 하면서 아빠의 주사를 다 받아줘야 했고, 동생을 돌봐야 했으니까요. 중학생으로서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했고, 실은 그런 힘도 내면에 있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보면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했을 텐데, 아버지가 그래도 애정을 주려고 했던 면을 끝까지 잊지 않으려고 했잖아요.
하지만 너무 어렸어요. 그런 일들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위로 받고, 보호 받고, 사랑 받고,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져야 하는데, 어린 나이에 자녀의 위치에 있지 못하고 부모의 위치로 올라가 버린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해요. ‘내가 이 와중에 꿋꿋하게 살아야지’, ‘내가 어쨌든 똑바로 살아야지’ 그런 마음이 강해지는데, 이것을 수도-인디펜던스(pseudo-independence)라고 합니다. 실은 의존적인데 겉으로만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독립성, 허구적 독립성이죠. 이런 특성을 갖게 되면 자녀를 키울 때 아이에게 지나치게 독립을 강요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아주 어른스럽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죠. 은하씨가 큰 딸에게 그런 것처럼요.
은하씨의 딸은 지금 불안해요. 아빠가 주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집을 떠난 것도 아니지만, 마음에 불안이 가득합니다. 소매 끝을 똑같이 맞춰야 하고, 바지 밑단도 똑같이 접어야 하고, 강박적이죠. 아이는 지금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알지만, 나를 대하는 엄마의 방식에서 충분한 안정감을 못 찾고 있어요. 엄마가 요구하는 큰 아이 역할을 제대로 못해내면 사랑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면 불안해지거든요. 불안하니까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거예요.
은하씨. 은하씨에겐 인생의 모든 것이 업무예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른과 부모 역할, 가장의 역할, 중심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이 은하씨가 해내야 할 책임들인 거죠. 마음 편안하게 즐기기도 하고, 자기를 확 풀어서 긴장을 이완하기도 하고, 이러질 못하는 거예요. 목적 없이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하씨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애정이 많으니까 아빠도 돌보고, 동생도 살피고, 나중에 엄마와 합쳐서는 역경을 헤치면서 열심히 산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이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없어서 어떤 때는 인간이 귀찮습니다. 은하씨의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어떨 때는 귀찮고 성가신 겁니다. 아이가 잠이 안 들면 편안하게 쉬지도 못 하니 빨리 잠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이는 하루 동안의 긴장과 자기 마음의 불편을 혼자 밤에 중얼대는 걸로 자기 나름대로 풀고 있는 건데 말이죠. 깨어 있는 매 순간, 모든 것이 업무이고, 의무이고, 책임인 은하씨. 그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까요.
은하씨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양가감정을 갖고 있어요. 아버지가 밉고 죽음으로 인해 해방됐다는 솔직한 느낌과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동시에 갖고 있죠. 고등어찜을 해주지 못했다는 끊임없는 죄책감은 자녀가 부모에게 느끼는 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느껴야 할 감정이에요. 부모들이 흔히 느끼는 ‘내가 이랬더라면 애가 더 잘 크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을 은하씨는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느끼고 있는 거예요.
아마 엄마에 대해서도 양가감정일 거예요. 엄마가 가엽기도 하고, 아빠 깨기 전에 얼른 도망가라고 말하긴 했지만, 막상 어른이 돼 부모 처지가 돼 보니 마음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식을 두고 도망갈 수가 있을까’ 그런 원망이, 해결되지 못한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늘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을 겁니다.
자녀로서 부모에게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은하씨의 힘든 마음을 엄마한테 선뜻 말도 못합니다. 언제나 은하씨가 부모 처지로 누군가를 케어 해줘야 하니까요. 은하씨의 불편한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표현을 못 하는 거죠. 엄마는 부재했고, 아버지는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동생은 내가 돌봐야 하는 대상이었으니 누구한테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아버지의 죽음까지 혼자 다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은하씨는 굉장히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그건 가상의 독립성이에요. 아직도 보호 받고 위로 받고 싶은 마음이 많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딸 아이한테도 위로 받길 원하고 있어요. 딸이 야무지게 자기 할 일을 다 해서 엄마를 위로해 주길 바라죠. 한편으로는 화도 날 거예요. 나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잘해냈는데, 아빠 초상까지도 치러냈는데, 아이는 왜 빠릿빠릿하게, 야물딱지게 해내지 못하는 걸까 싶죠. 하지만 아이는 못 해내는 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이니까요. 아이는 강박이 생기고 불안해질 뿐이에요.
은하씨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다시 자녀의 위치로 내려오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친정엄마에게 말하세요. 울면서 말하세요. 정말 힘들었노라고, 가까스로 버텼노라고, 엄마가 정말 필요했노라고, 울면서 그렇게 말해야 해요. 엄마한테 위로를 받는 경험을 해야 해요. 좌절된 의존적 욕구를 이제라도 채워야 합니다. 엄마에게 부담을 줄까 봐 미안한가요? 그런 부담은 부모한테 줘도 돼요. 부모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말해도 괜찮아요. 딸이 유치원에서 힘들었던 얘기를 하면 은하씨는 그게 싫은가요? 그렇지 않잖아요. 은하씨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은하씨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불변의 진리예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배우자는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이기 때문에 배우자로부터도 정서적 보호와 위로를 받아야 해요. 남편한테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은하씨. 딸은 다시 어린 아이의 위치로 돌려놔 줘야 해요. 당연하죠, 아이니까. ‘너는 점점 배워가야 하는데, 아직은 어리니까 천천히 하자. 너는 어린아이니까’ 이걸 외우고 또 외워서 아이에게 말해주세요. 말하고 또 말해주세요.
은하씨. 당신은 정말 이제까지의 삶에 최선을 다했어요. 너무 힘들었죠?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정말 잘해왔고요. 이제는 마음을 내려놔도 괜찮아요. 좀 허점을 보여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좀 게으를 정도로 내려놔도, 열심히 안 하고 쉬어도 괜찮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이 세상에서, 이 우주에서, 은하씨가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 그걸 잊지 말아요. 당신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나 자신을 내가 돌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걸요.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온 은하씨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다시 한번 안아주고 싶다는 말, 꼭 하고 싶어요.”
정리=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이 사연은 육아 관련 정보와 공감 콘텐츠를 모은 네이버 모바일 주제판 맘키즈와 한국일보가 공동 진행하는 이벤트를 통해 접수됐습니다. 상담은 맘키즈 블로그에서 20일까지 신청할 수 있습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오은영 박사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와 맘키즈에 소개됩니다. 한국일보 인터넷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도 신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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