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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아빠는 학원을 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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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그림만 그린다고 야단맞았다. 가로찢어 하얀 뒷장을 도화지 삼는 통에 달력이 집에 남아나질 않았다. 결실은 꽤 컸다. 초등 2학년 때 도(道) 사생 대회에서 고학년들을 제치고 대상을 받았다. 라디오에 출연하며 일약 ‘그림 신동’이 됐다. 온갖 대회에 나가 상을 길어 왔다. 64색 크레파스 선물에, 원치 않는 미술학원에 다니는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간섭이 흥미를 지웠고, 강습이 창의를 죽였다. “얼굴은 살색(피부색이 하나가 아니라는 이유로 2002년 11월 사라졌다)으로 칠해야지”, “사람을 코끼리보다 크게 그리면(그래선지 국제대회에서 수상했다) 어떡해”. 숨막히는 학원 가르침 덕에 재미가 쌓은 재능은 몇 년 만에 바닥났다. 고흐 고갱 고야, 고씨 3대 화가를 잇겠다는 꿈도 스러졌다. 나중에는, 없는 살림에 기껏 학원 보내놨더니 그림 안 그린다고 야단맞았다. 이후 내가 돈 내고 다닌 학원은 자동차학원이 전부였다.
유년기 학원 잔혹사를 자랑마냥 읊는 건 결전의 날이 다가와서다. 4학년 겨울방학이 코앞인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장모님 노동을 착취해, 아내의 실직을 핑계로 버텨오던 학원 제로 시대가 막을 내릴 위기다. 둘 다 이제 일터를 바꾼 비정규직인지라 휴가는 언감생심, 집안의 유일한 정규직이자 회사 눈치 안 보기로 작정한 나조차 낼 수 있는 휴가는 일주일 정도일 테니 나머지 3주가 막막하다.
“대치동으로 이사부터 가”(의대생 아빠) “학원은 빠를수록 좋아”(서울대 남매 엄마) “이제 중학교 수학 준비하려고요”(아들 또래를 둔 부모). 확증과 조언, 자랑이 홍수를 이루지만 우리 부부는 그 물길을 거슬러가는 연어를 품었다. 물살이 거세 가끔 힘이 부쳐도 방향성은 유지했노라 자부하던 터다. 학원 안 다니고, 게임도 안 하지만 잘도 논다.
거창한 교육 철학이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아이로 자라면 좋을까, 아내와 틈나는 대로 얘기하다 보니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사’자 직업을 갖고 돈을 많이 버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적잖은 세월 기자로 목도한 그들의 실상은 더러 추했고,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 취재 속에서 건져낸 희망은 12년(초중고교) 고행 뒤에 있지 않았다. 아내 역시 ‘지금 아이가 행복을 느끼는 게 진짜 행복’이란 주의다.
각축을 못 피한 나는 이 지경이 됐지만 넌더리 나는 경쟁을 아이에게까지 물려주지 않겠다는 우리 세대(X세대라 불리는 70년대생)의 더께 앉은 젊은 날 묵계도 실천하고 싶었다. 사교육 폐해를 고발하는 기사를 쓰면서 내 아이를 그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유체이탈을 선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래 주역이 될 아이에게 구태의연한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어리석다고 여겼다. ‘유엔미래보고서2050’은 “시험은 사라지고 국영수로 대표되는 전통 수업 과정 대신 소통 창의성 분석력 협업을 배운다”고 내다봤다.
그래도 ‘학원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버리진 못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두 개를 까먹는 아이와 부대낄 때마다 ‘수학학원만 보내볼까’ 속삭임이 들린다. 이런 사태를 예비해 영리하게 자물쇠에 ‘아이가 바라면’이란 패스워드를 걸어 뒀다. 윽박질러서, 쓸데없는 비교를 동원해 원하도록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아이 의견을 백분 존중한다. 토요일 허리(오후 2시)를 확 잘라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든 드럼 강습도 아이가 먼저 원했다.
사실 이번 방학은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결전을 미루고 학원과 아빠 모두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 수도 있으리. 그렇게 다음 대화가 탄생했다.
“종일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방학 중에 수학학원이라도 다닐래?”
“(…) 학원 다니면 인생 망친대요.”
“누가 그래?”
“학원 다니는 친구가요.”
“(헐)”
“그냥 아빠가 일찍 와서 수학 가르쳐주면 안돼요?”
학원을 이기려다 아들에게 녹아웃(KO) 당했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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