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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기계한테 절하는 한솔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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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이나 몇 박스 전해 줄 요량이었다. 총파업 지지 같은 거창한 뜻은 없었다. 다급한 연락이 왔을 때 ‘파업 개시’ 기사 한 줄로 갈음한 게 못내 걸렸다. 오가는데 이틀, 잠깐 현장 볼 겸 방학에 갈 곳 없는 아이를 동생 집에 맡길 겸 3일 휴가를 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23일 첫새벽 전남 담양에서 장흥으로 농활 떠나는 파업 노동자들 틈에 아니 낄 수 없었다. 고랑에서 고정 핀 뽑은 뒤 부직포를 말고, 이랑에서 나무 뽑은 후 비닐을 걷어내느라 더웠다. 긴급재난문자가 왔다. ‘한파주의보 발효!’ ‘생명의 나무’라 알려진 모링가(Moringa) 밭 우거진 잡초를 낫으로 베고 베도 죽을 맛이었다. 3,300㎡, 허리는 굳고 삭신은 쑤셨다.
“비겁해서 그랬습니다.” 농활이 끝날 무렵 15년 차 노동자가 대뜸 말했다. 기자란 놈이 서울에서 내려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호졸근하게 일만 하니 답답했던 모양. 혀가 바싹 말라 물을 기운이 없었다. 기선 잡은 그의 넋두리가 두서없이 아렸다. 한솔그룹 계열사인 골판지 생산업체 한솔페이퍼텍㈜에서 벌어진 일들을 두루 듣고 기록한다.
지난해 9년 차 생산직 시급은 6,346원으로 최저임금(6,470원)보다 124원 적었다. 10년을 다녀야 최저임금에 18원을 얹어 줬다. 신입사원은 5,856원. 올해 최저임금 대폭 인상(7,530원) 논란은 먼 나라 얘기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0.3시간. 더러 월 평균 120시간이 넘는 초과근무를 했다. 12시간 맞교대도 모자라 ‘3.5조3교대’라는 기이한(여러 번 설명 들어도 도통 모르겠다) 근무형태를 도입했다. 12시간 근무 마치자마자 공장 페인트칠, 바닥청소 등 ‘전사적 생산보전’(TPM) 4시간이 추가되는 일이 잦았다. 도합 16시간 노동. 본디 TPM은 최고경영자가 솔선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주 52시간) 논의는 팔자 좋은 소리다.
개인마다 기계를 지정해 주고 감사하는 표어를 직접 지어 기계설비 옆에 붙이게 했다. 기계한테 감사하라며. ‘전력 감소로 비용 절감 해 주는 버티칼 스크린에 감사합니다’ ‘화재 진압 일선에서 대기 중인 옥내 소화전 소방펌프 노고에 감사합니다!’ 식이다. 정작 6일간 야근과 잔업에 시달리다 손가락 4개가 잘린 산재는 노동자 잘못으로 몰았다. 기계는 주인, 노동자는 노예였단다.
전 직원에게 책을 돌린 뒤 독후감 제출을 ‘반강제’했다. 내지 않으면 단체대화방에 실명을 공개했다. 잘 시간도, 쉴 시간도, 가족과 함께 할 시간도 부족한 그들은 주로 긍정 마인드를 설파하는 책을 읽어야 했다. 회사 닦달에 못 이겨 인터넷에서 독후감을 사서 내기도 했다.
그룹 VIP(임원들)가 납신다면 그나마 없는 인력을 따로 떼어 내 한달 전부터 청소를 시켰다. ‘환경정리 때 휴가, 휴일이라고 쉬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공지도 올렸다. 과장급이라는 30대 사주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어김없이 먼지 털기 등 환경정리 조가 꾸려졌다.
노동자들은 “비겁해서” 최저임금 위반, 상습 초과노동, 사측의 갑(甲)질에 침묵했노라 고백했다. 회사가 거짓으로 시간외(OT)수당을 최저임금이라 우겨도, 기계를 인간 대접하며 감사 의무를 안겨도, 입바른 소리하다 혹여 당하게 될 불이익을 겁냈다. 남도 시골의 작은 공장 처지를 누가 신경이나 쓸까 싶었다. 6년 넘게 사측의 처우 개선 약속에 기댔다.
“애들한테 부끄러웠어요.” 노동조합조직률이 10.3%에 불과한 이 땅에 작년 여름 70명이 노조를 결성했다. 비노조 경영을 표방한다는 한솔 계열사 중 두 번째, 10년 만의 노조다. 생존에 저당 잡힌 정의를, 자책에 파묻힌 용기를 되찾기 위해. 파업이 능사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영화 ‘비 그치다’). 그들은 비겁하지 않다.
-31일로 파업 51일째, 비가 그치길 소망하며.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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