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文정부에 기대는 실용보다 가치에
연이은 불공정 파문으로 정치자산 소진
정권 맡긴 시대적 요구 다시 상기해보길
매 정권의 키워드가 있다. 출범 때 야심차게 선언하는 정체성이자 국민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하고 기대하는 국가운영의 대표원칙이다. 거창하게는 당대 다수 국민의 요구에 부합하는 시대가치다.
이명박정부에서는 단연 ‘경제’였다, 도덕성 따위는 제쳐두고 유권자들은 “경제대통령” 호언에 몰표를 던졌다. IMF 이후의 긴 침체에 지쳐 산업화시대의 역동성을 기대했다. 결국 갖은 부패와 비리로 퇴임 후 단죄됐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빠르게 극복하고 비교적 괜찮은 경제지표를 만들어 낸 것만은 그럭저럭 인정할 만했다.
박근혜정부에선 ‘행복’이었다. 낡아 버린 박정희 추억의 마지막 재활용 정서가 그를 아슬아슬하게 대통령으로 만든 터라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바뀐 시대정신은 결국 퇴행으로 질주하는 그를 임기만료까지 놓아두지 않았다. 행복을 키워드로 삼은 정권에서 정작 많은 국민이 행복해했을 때가 그가 권좌에서 내려오던 순간이었다는 건 지독한 아이러니다.
촛불의 요구는 특권도 차별도 없는 세상이었다. 예전 산업화에서 민주화로의 이행이 거대한 국가프레임의 변화였다면, 이제 개별적 삶의 질 보장을 요구하는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다. 갈수록 좁아지는 기회의 문 앞에서 다른 이의 특권은 곧 나의 부당한 손해라는 각성이 일반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문재인정부의 대의가 ‘평등 공정 정의’(셋은 사실 동의어다)임은 그래서 당연한 것이었다. 더구나 정의는 노무현정부의 선행 키워드였다. 그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이 정부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공정사회의 기틀을 잡거나 최소한 가능성이라도 보여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대는 너무 빨리 무너졌다.
이 정부의 이념 지향을 잘 아는 터에 경제 안보 외교 등 구체적인 국정 실적에는 애당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평등공정의 실현이 기대의 본질이었다. 말하자면 문 정부의 정치적 자산은 실용자산이 아닌 가치자산이었다. 이 정부에 관한한 무능은 용서가 돼도 불공정은 용서받기 어려운 까닭이다. 권력형 비리보다 훨씬 사소한 자녀특혜 여부 문제가 번번이 더 커지는 상황도 이 때문이다.
잠깐 곁길로 돌자면 징병제의 순기능은 완벽한 평등 체험이다. 동시대 젊은이 간에 출신·학벌·재산·직업 등 모든 사회적 조건이 무화(無化)하는 단 한 번의 인생 경험이다. 갈등과 반목이 유난한 한국사회에서 이 공평한 경험이 일정 부분 공동체 인식의 접착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다. 고작 2~3년 군대기억을 평생 즐거이 되뇌는 특이 문화에서 병역 불평등은 아무리 가벼워도 용납되지 않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정권과 지지자들이 전·현 법무부 장관을 결사옹위하는 건 검찰개혁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개혁 또한 본질은 공정 실현의 수단이다. 자의적 차별적으로 행사돼 온 검찰권을 축소 분산함으로써 특권과 불공정 소지를 없애자는 게 취지다. 나란히 공정성 시비에 말림으로써 그 둘을 앞세운 검찰개혁마저 완연히 희화화됐다.
연이은 불공정 파동으로 이 정부는 거의 유일한 정치자산을 다 잃었다. 남은 선택은 둘뿐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최대한 자산손실 복구에 나서든지, 아니면 극렬지지층에 기대 관성(慣性) 행보를 계속하는 길이다. 초심을 살려 불공정성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의지를 보인다면 나름의 정권가치를 웬만큼은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다. 그렇지 않으면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또 다른 파당의 의미 없는 집권기로나 평가될 것이다. 노무현정신 계승은 어림도 없는 얘기다.
차기대선의 향방도 이 선택에 좌우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선택의 당사자는 물론 문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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