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속칭 ‘찌질이’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활발하고 눈에 띄는 아이들이 부러웠어요. 친해지고 싶었지만 제 스스로 ‘난 절대 못 어울려’, ‘그건 잘 나가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라 생각했어요. 그런 애들이랑 있을 때 주눅드는 제 자신이 너무 힘들었어요.
중고등학생 때는 제법 친구도 많았지만 뭔가 불안했어요. 항상 웃기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웃긴 영상을 찾아다 보고 ‘저걸 기억해서 나도 저렇게 해야지’라고, 책을 읽을 때도 ‘이 문장은 꼭 기억해야지’ 했었지요. 어떨 때는 제가 연기하는 것만 같았어요. 앞에 카메라가 있는 것처럼 다른 친구들에게 무슨 대사를 할지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저는 엄마, 아빠를 엄청 따랐지만 두 분 관계는 좋지 않았어요. 엄마는 외향적이고 강했고, 아빠는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무뚝뚝했어요. 엄마는 그런 아빠를 비난했어요. 아빠는 늘 혼자 동떨어져 있었고, 저는 그런 아빠가 신경 쓰였어요. 제 여동생은 엄마 옆에 붙어 엄마랑만 잘 지냈어요. 귀엽고 예쁜 건 늘 동생이었고, 저는 그저 제게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아 모든 걸 그냥 참았어요.
엄마는 제게 종종 “너는 어쩜 아빠랑 성격이 그렇게 똑같니, 네 동생은 날 닮았는데…”라고 했어요. 성적이 나쁘면 엄마는 저랑 일주일 정도 대화를 안 하기도 했어요. 엄마가 제게 배짱이 없다고 했을 때는 수치스러웠어요. 엄마랑 가방을 사러 갔을 때 뭔가 말하는 게 겁나 머리를 만진 적 있는데, 엄마는 ‘더럽게 머리를 긁고 있냐’고 한 적도 있어요.
전 아빠를 따르지만, 아빠는 절 좋아하지 않아요. 어릴 때 네 식구가 잘 때 아빠가 섭섭할 것 같아 아빠 옆에서 잤는데도, 아빠는 아침에 안 일어난다고 저를 발로 찬 적도 있어요. 아빠는 화도 자주 냈어요. 이사 간 집의 벽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가 아빠가 “그럼 찢어버려”라고 소리를 질러 무서웠던 기억도 있어요.
대학생이 된 지금도 다른 사람과 있는 게 힘듭니다. 학교도 휴학하고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가치 없는 것 같고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볼 것 같아요. 활발하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지금 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김수미(가명ㆍ25세ㆍ대학생)
수미씨,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어요. 특히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하지요. 이런 경험은 자존감과 자부심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끊임없이 다양한 신호를 보내는데 부모가 이 때 한결같이 반응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한 가지 원인 때문이라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성격은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과 길러지는 것의 합입니다. 그래서 내 아이의 타고난 기질적 특성을, 부모인 내 자신의 기질과 성격을 잘 이해해서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영향을 잘 탐색하는게 중요하지요. 결론적으로, 성격은 기질적인 영향보다 양육태도와 방식에 영향을 더 받습니다.
사연을 보면 수미씨는 반응이 느린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수줍음도, 겁도 많아서 낯선 환경에 불안해하고 자기 욕구나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무시를 당하기도 했을 겁니다. 전반적으로 느리지만 환경에 대한 반응이 느릴 뿐, 적응되면 잘 해냈을 거예요. 이런 아이를 다그치면 자존감이 부족한 아이로 될 수 있습니다. 대기만성형인데도요.
반면 수미씨 어머니는 감정기복이 있고 에너지가 많은 분 같아요. 적극적이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그래서 잔소리나 비난도 많은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수미씨와 어머니는 기질이 많이 다른 거죠.
이렇게 다를 때는 엄마가 아이의 특성을 잘 알아차려서 편안하게 맞추어 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어머니는 수미씨가 잘 크기를 바랬겠지만, 수미씨가 마음이 편안한 사람으로 크도록 도움을 많이 주진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수미씨 아버지입니다. 비슷한 성격이니 수미씨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수미씨를 공감해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성장과정이라면 수미씨가 적절하게 자기확신을 경험하고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단단하게 형성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불안이 높아지고 내적 긴장감이 쉽게 상승하고 타인으로부터 받는 자극에 굉장히 예민해지는 거지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청소년기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시기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도, 못지 않게 ‘타인이 바라보는 나’도 중요합니다. 외부 평가에 온 신경이 곤두서죠. 예를 들어서 외부에서 온 자극이 1이라 해도 수미씨가 받아들이는 자극은 10까지 치솟아요.
10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수미씨 내면을 마구 헤집어놔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넘어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에까지 이르는 거죠. 수미씨는 다른 사람이 주는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그게 마치 인생의 실패인 것처럼 해석하는 인지적 틀을 갖고 있어요. 남들에게 잘 맞춰서 즐겁게 해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까요. 어린 시절부터 있는 그대로의 편안한 모습을 인정 받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람은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감정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히 생애 첫 타인인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정당화되고, 사랑받는 과정을 통해 자기확신을 만들어 갑니다. ‘이렇게 있어도 괜찮네’, ‘내가 하는 게 맞네’라는 자기 확신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기준을 형성해줘요. 수미씨 부모님은 그런 부분에서 부족했어요.
수미씨 부모님 관계도 아쉬운 점이 많아요. 어머니는 남편이 답답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수미씨가 어머니를 좋아했지만 어머니가 불편했듯, 아빠도 아내가 편하지 않았을 거예요. 같이 있으면 긴장되고, 두려기도 하고, 어쩌다 싸우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거예요. 엄마는 그런 아빠를 비난까지 했지요.
아마 수미씨는 아빠에게 가장 편한 존재였을 거예요. 자신을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편안한 딸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아빠는 꾹꾹 눌러둔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가장 편안했기에 당신에게 표출했을 겁니다. 엄마에게 수미씨는 아마 ‘남편의 복제물’ 같았을 거예요. 그래서 아빠의 부족한 면을 닮은 딸을 지적해서 뜯어고치려고 했을 거예요. 어린 당신은 그런 모든 것들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꼈을 겁니다.
제게 당신이 너무 가엾고, 가슴이 아팠던 건 당신이 가족에게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였어요. 그런데도 당신의 가족들은, 성향이 비슷했던 아빠조차 감정 표현에 서툴러 당신을 제대로 보듬어주지 못했어요. “아빠가 감정표현도 서툴고, 내성적이지만 살아보니 이런 면이 신중하고 좋은 점도 많더라”라고 당신을 인정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너무 아쉬워요.
수미씨, 반드시 재미있는 사람만이 좋은 친구는 아니잖아요. 재미없어도 좋은 친구일 수 있죠. 중요한 건 당신이 당신만의 내면의 기준을 갖추고 있느냐입니다. 당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생각의 흐름을 바꿔야 합니다.
우선 타인의 자극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내면으로 가져와 당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고착화된 인지적 틀에서부터 벗어나야 해요. 공책에다 당신이 갖고 있는 면을 한번 쭉 써보세요.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도망가고 싶어져’, ‘나는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불안해’ 같은, 당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말입니다.
그 뒤 그런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보세요. ‘내가 이런 면이 있지만, 사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었구나’, ‘내가 무서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네’, ‘내가 좀 부끄럽게 행동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말수가 적지만 좀 친해지면 나아질 것 같아’라는 식으로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해요. 정말 당신이 못나고 부족해 보이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썩 괜찮은 면이 많을 거예요. 저는 당신을 만나보진 못했지만 당신이 꽤 괜찮은 사람일 것 같은 확신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직접 녹음해서 들어보세요. ‘수미야, 너 오늘 너무 괜찮았어’, ‘수미야, 네가 태어나서 너무 기쁘고 고마워, 사랑해’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보면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질 거예요. 학교를 다시 다니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학교를 가는 게 수석졸업을 하기 위해서라든가, 친구 100명을 사귀기 위해 가는 건 아니잖아요. ‘이왕 학교를 다니니 졸업은 하자’ 정도만 기준으로 삼으세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당신의 기준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보세요.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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