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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지면 죄인, 대만 메달은 배신”…올림픽이 달군 中 민족주의

입력
2021.08.08 12:00
수정
2021.08.08 13:4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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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에 금메달 뺏기자 '샤오르번' 비하 발언 봇물
中, 美 누른 '2008년 베이징 영광' 재현에 총력
CNN "中 공산당, 선 넘은 민족주의 용인" 지적
SCMP "반일 감정 폭발", BBC "금메달이 애국"

중국 류스원 선수가 도쿄올림픽 탁구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일본팀에 패한 뒤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중국 류스원 선수가 도쿄올림픽 탁구 혼합복식 결승전에서 일본팀에 패한 뒤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의용군행진곡을 샤오르번(小日本·소일본)에 울려라.”


중국이 도쿄올림픽 첫 금메달을 딴 지난달 24일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웨이보에 승전보와 함께 올라온 댓글이다. ‘의용군행진곡’은 중국 국가(國歌), ‘샤오르번’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담긴 비하 발언이다. 종합하면 “일본을 깔아뭉개자”는 모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좋아요’는 47만 개를 훌쩍 넘어 단연 1위에 올랐고 유사한 내용의 댓글이 줄을 이었다. 미국 CNN 방송은 “인민일보는 가장 엄격하게 댓글을 관리하는 매체”라며 “그럼에도 선을 넘은 민족주의 정서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반일 감정이 폭발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번 올림픽에서 드러난 중국 여론의 비이성적 성향을 이렇게 평가했다. 고귀한 스포츠정신이 편협한 중화우월주의의 배출구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탁구 혼합복식 결승에서 일본에 져 금메달을 놓친 중국 선수들은 “제가 팀을 망쳤다.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눈물을 떨구며 사죄했고, 중국 팬들은 위로는커녕 “너희는 국가에 먹칠을 했다”며 단단히 호통을 쳤다.

대만 왕치린(오른쪽) 리양 선수가 도쿄올림픽 배드민턴 남자복식 결승전에서 중국팀을 완파한 뒤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하고 있다. 중국 여론은 "배신자"라고 들끓었지만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전투기를 띄워 선수들을 호위하며 전례 없이 환대했다. 도쿄=AP 연합뉴스

대만 왕치린(오른쪽) 리양 선수가 도쿄올림픽 배드민턴 남자복식 결승전에서 중국팀을 완파한 뒤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하고 있다. 중국 여론은 "배신자"라고 들끓었지만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전투기를 띄워 선수들을 호위하며 전례 없이 환대했다. 도쿄=AP 연합뉴스


남자 체조에서 일본에 금메달을 빼앗기자 중국 네티즌은 심판의 편파 판정이라고 극렬하게 항의하며 온라인에서 인신공격을 일삼았다. 팔로워가 100만 명이 넘는 중국 블로거는 “이제 올림픽 정신 따위는 없다. 오직 반일 정신을 일깨울 뿐”이라며 지지자들을 선동했다. 팔로워가 149만 명에 달하는 다른 인플루언서는 “일본인들이 올림픽을 중국 민족주의 교육을 위한 대형 이벤트로 만들었다”고 가세했다.

중국이 이처럼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건 도쿄올림픽의 상징성 때문이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미국을 제치고 처음으로 종합 1위(금메달 집계 기준)에 올랐다. 올림픽 첫 출전 76년 만이다. 하지만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연달아 미국에 밀렸다. 이에 ‘베이징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원정 대회 역대 최다인 777명의 매머드 대표팀을 꾸려 일본에 보냈다. 미국과 전방위로 맞붙는 상황에서 설욕전을 다짐한 셈이다. 스포츠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금메달 개수에 연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1일 톈안먼 망루 위에 올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 연설 말미에 주먹을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베이징=신화 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1일 톈안먼 망루 위에 올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 연설 말미에 주먹을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베이징=신화 뉴시스


이번 올림픽은 시기적으로도 공산당 100주년 행사를 거치며 중국 애국주의가 가장 고조된 시점에 열렸다. 더구나 일본은 대만, 홍콩, 신장위구르 등 중국의 민감한 이슈를 놓고 미국과 결속해 반대진영에 가담한 터라 중국에게 달가울 리 없다. BBC는 “중국이 민족주의 열풍에 휩쓸리다 보니 올림픽 메달 집계가 스포츠의 영예를 넘어섰다”면서 “선수가 메달을 못 따는 건 애국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사격에서 금메달을 딴 양첸 선수가 웨이보에 올린 나이키 신발 사진을 트집 잡아 “중국을 떠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지난해 12월 찍어 올린 것이라 올림픽과 상관 없는데도 극성 네티즌은 “중국 대표선수가 왜 미국 신발을 갖고 있느냐”며 반미 감정을 부추기는 억지주장을 폈다. 나이키가 인권 탄압을 이유로 신장지역 면화 사용을 거부하면서 중국에서는 불매운동이 한창이다.

도쿄올림픽에서 중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사격선수 양첸이 지난해 12월 웨이보에 올린 신발 컬렉션. 중국 네티즌은 사진에 미국 나이키 제품이 포함된 것을 문제 삼아 금메달리스트인 그에게조차 "중국을 떠나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웨이보 캡처

도쿄올림픽에서 중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사격선수 양첸이 지난해 12월 웨이보에 올린 신발 컬렉션. 중국 네티즌은 사진에 미국 나이키 제품이 포함된 것을 문제 삼아 금메달리스트인 그에게조차 "중국을 떠나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웨이보 캡처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앞세워 대만도 매몰차게 몰아세웠다. 배드민턴 남자 복식에서 대만이 중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자 일부 성난 여론은 “배신자 대만 선수들을 반역과 반란죄로 처벌하라”고 들끓었다. 미국 폭스뉴스는 “중국 공산당이 부추긴 강렬한 민족주의가 스포츠로 번지면서 이웃나라들에게 금메달을 놓칠 때마다 여론이 분개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중국은 “올림픽을 이용해 적대적 행동을 조장한다”는 온갖 비판을 일축하며 미국에 역공을 펴고 있다. 환구시보는 “중국의 민족주의를 겨냥하는 건 향후 미중 갈등의 책임을 중국에 돌리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면서 “미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적 열등감과 극단적 민족주의가 팽배한 국가”라고 주장했다.

베이징=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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