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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슨이 이승만 기념관을 짓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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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추석 연휴에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을 찾았다. 첫 개관을 한 지 10년이 넘었고, 증축 후 재개관을 한 지도 4년이 지났다. 지금껏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기념관에 연휴를 할애한 건, 이승만 대통령기념관 설립을 두고 왈가왈부 쏟아지는 논란의 영향이었다. 앞서 비슷한 공방을 겪다 우여곡절 끝에 지어진 박정희 대통령기념관은 어떤 모습일지 직접 보고 싶었다.
볼거리, 들을거리가 적지 않았다.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비롯한 각종 회의에서 그의 육성을 생생하게 들어볼 수도, 그가 직접 그린 경부고속도로 스케치 그림을 볼 수도 있다. 파독광부 고용계약서 원본, 1979년 10월 26일 달력이 걸려 있는 마지막 집무실 모습, 비공식적으로 타고 다녔다는 벤츠600 차량 실물, 계급장 훈장 등 각종 유품까지 희귀한 전시물도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공간에는 ‘영웅 박정희’만 있다. 5∙16 군사정변은 암흑 같던 현실에 종지부를 찍는 부패와 무능에 맞선 ‘혁명’이고, 유신은 끊임없는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과 사회 불안 등에 따른 그의 ‘용단’이다. 집권 18년은 경제는 물론이고 외교, 국방, 문화, 교육 전 분야의 화려한 업적만으로 가득하다. 과(過)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비판과 시련’이라는 아주 협소한 별도 전시실을 두고 있지만,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갈등(1965년), 울진 무장공비 침투(1968년), 개발제한구역 설정에 대한 일부 비판(1971년) 등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 몇 꼭지가 전부다.
박정희가 그렇듯, 이승만도 대한민국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제헌국회 의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을 지내며 현재 대한민국의 근간을 만든 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기념관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을 수는 있겠으나, 정적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앞장섰듯 화합의 차원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 기념관 건립 기부금을 낸 배우에게 돌팔매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다고 기념관이 역사 왜곡의 공간일 순 없다. 이 공간에는 반민특위 활동을 억압해 친일파들이 활보하게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꼭 있어야 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사수 호언 방송에도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것을 둘러싼 논란, 군경에 의해 거창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된 내용도 절대 빠지면 안 된다.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이 있는 그대로 담겨야 함은 물론이다. 건립추진위원장인 김황식 전 총리는 “공과를 모두 담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못하겠다. 수많은 과오를 모두 담겠다고 기념관 설립에 이렇게 열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뜬금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세계적인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이 이승만 기념관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그의 전기는 주변에 차고 넘치는 무수한 영웅담, 성공담과는 다르다. 워싱턴포스트는 “아이작슨의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저널리즘적”이라고 했다. 일화를 각색하거나 꾸며내지 않고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전기를 쓰기 위해 2년여간 밀착 관찰했고, 무려 130여 명의 주변 인물 인터뷰를 했다. 머스크의 성공 스토리를 쫓아가면서도 때론 미치광이로, 때론 사악한 인물로 묘사한다.
기념관을 건립해야겠다면, 그런 마음가짐이 돼 있어야 한다. 혹여 ‘이승만신격화기념관’을 만들 요량이라면 이를 추종하는 민간에 전적으로 맡기시라. 정부가 앞장서서, 그것도 수백억 원 국민 혈세를 들여서 기울어진 역사공간을 만들어선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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