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기생충·베테랑은 좌파 영화... DNA에 스며든다"

보수정당 강연에서 좌파 영화·연예인 지목
"문화 권력도 좌파로 기울어졌다" 주장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8일 오전 경기 과천시에 마련된 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관객수 1,000만명이 넘은 영화 '기생충', '베테랑' 등을 좌파 영화로 규정하고 비판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이 후보자는 영화뿐 아니라 배우나 가수 등 연예인을 별다른 근거 없이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기도 했다.

이 후보자는 2022년 12월 10일 원외 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한 행사에 강연자로 나서 MBC 언론노조를 비판하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 이 후보자는 이 강연에서 '문화권력도 좌파 쪽으로'라는 제목의 자료와 영화 제목 목록을 띄우면서 "기가 막힌다. 좌파 성향의 영화를 만들면 이렇게 인기를 끈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자가 '좌파 영화'로 지목한 영화들은 '기생충', '베테랑', '택시운전사', '변호인', '설국열차', '암살' 등이다. 대부분 개봉 당시 큰 인기를 끌어 관객수가 1,000만명을 넘긴 작품들이다. 반대로 '국제시장', '태극기 휘날리며', '인천상륙작전' 등은 '우파 영화'로 꼽았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CJ ENM

이어 이 후보자는 "누구는 영화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을 결정했다고 하는데, 알게 모르게 우리 몸 유전자정보(DNA)에 스며든다"고 덧붙였다. 판도라는 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영화다. 영화 개봉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 영화를 관람했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문 전 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탈원전 정책을 추진할 결심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후보자는 또 우파 연예인보다 좌파 연예인이 훨씬 많다면서, 좌파와 우파로 나눈 연예인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영화배우 정우성, 권해효, 문소리 등을 좌파 연예인으로, 김흥국, 소유진 등을 우파 연예인으로 분류했는데, 이렇게 구분한 기준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았다. 정우성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의 내레이션을, 권해효는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내레이션을 맡았다는 사실만 적시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지난해 24일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가운데, 이날 서울 강남구의 한 극장에 '서울의 봄' 포스터가 붙어 있다. 고영권 기자

이 후보자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도 좌파 영화로 규정한 바 있다. 그는 "시공간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건이나 인물의 경우, 영화는 사실상 역사를 '재구성'하는 역할을 한다"면서 "현재의 10, 20대가 '서울의 봄'을 볼 때, 그들은 전두광을 전두환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언급했다. 이어 "좌파는 영화가 가진 힘을 안다"며 "'택시운전사', '남산의 부장들', '1987', '서울의 봄'에서 팩션(faction·사실과 허구를 섞은 이야기)은 역사가 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언론계는 방송통신위원장에 이 후보자를 지명한 것에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기자연합회, 한국PD연합회 등 7개 언론단체는 4일 공동성명을 통해 "이진숙 후보자 지명은 김홍일 전 위원장이 준비해 놓은 공영방송 장악을 목표로 친정부 이사진 낙하를 실행하기 위한 인사"라며 지명 철회를 촉구했다. 90여개 언론단체와 시민단체 등이 모인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도 5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후보자는 스스로 '좌파 미디어 카르텔'을 혁파할 '우파 전사'라 칭하며 정치 균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