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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키 "사람들에 잊히는 것 두려워"... 속내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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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 아이키가 여성 국극의 일대기를 접하고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만큼 두려운 게 없다"라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SBS 제공
댄서 아이키가 여성 국극의 일대기를 접하고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 만큼 두려운 게 없다"라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장혜진 고규필 아이키가 리스너로 출연한 가운데, 드라마 '정년이'의 실제 모델이자 우리나라 팬덤의 원조인 여성 국극의 일대기가 그려졌다.
이날 방송에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엄청난 팬덤을 이끈 원조 스타들, 여성국극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여성국극의 중심에는 남자 주인공을 맡았던 간판스타 임춘앵이 있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전국의 여학생들과 주부들이 공연장으로 몰렸고, 그 관객수는 하루 평균 700명에 달했다. 팬네임은 '고무신 부대'였다. '고무신 부대'는 임춘앵을 보기 위한 인파로 인해 고무신이 벗겨지고, 그 고무신이 한 트럭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고무신 부대'였다는 홍성덕 씨는 “배우를 좋아해서 시집도 안 가고 그 옆집에 살았던 팬도 있었다”며 “그땐 조용필, 임영웅 인기도 문제도 아니었다”고 당시를 증명했다.
여성국극의 역사는 임춘앵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녀의 본명은 임종례로, 국악 신동이었던 그는 22살이던 1948년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창경원(창경궁의 옛 이름)에서 신예 국안인으로 데뷔 무대를 꾸미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어느 날, 임종례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임종례가 국악인들의 롤모델인 박녹주 명창으로부터 여성 국악인들로 이뤄진 새 단체의 창립 멤버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것이다. 예인으로서 자부심을 지닌 임종례는 최초의 여성창극단 여성국악동지사에 합류했다. 이름 또한 '봄의 꾀꼬리 소리'를 뜻하는 임춘앵으로 바꾸며 새 인생에 첫 발을 내디뎠다.
여성국악동지사는 첫 무대로 '춘향전'을 준비했지만, 남자 주인공 이몽룡을 연기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막내였던 임춘앵이 이몽룡을 연기해야 했는데 그녀는 체중을 늘리고, 6개월간 목이 터져라 고함을 쳐서 거친 소리와 발걸음을 익힌 후 18살 꽃미남 이몽룡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공연은 흥행하지 못했다. 이후 임춘앵은 새 여성국극단 '임춘앵과 그 일행들'을 만든 후 무대장치가 원우전을 영입해 다시 도전했다. 그 당시 상상도 못한 미러볼을 이용한 공연은 초대박이었다. 임춘앵을 포함해 여성국극 배우들의 인기는 치솟았다. 박녹주 명창의 제자 이옥천 명창은 "팬들이 자동차, 집을 사주기도 했고, 안 만나 주면 혈서를 쓰기도 했다"라고 뜨거웠던 팬덤을 떠올렸다.
여성국극단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에도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공연을 이어갔다. 여성국극의 인기에 대해 당시 "극장이 무너질 것 같다는 소리가 들렸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은 예기치 않게 연달아 일어났다. 임춘앵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으며, 영화 인기가 높아지면서 공연할 무대가 사라지자 임춘앵은 신경쇠약으로 술에 의존하는 날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임춘앵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이후 임춘앵이 한 병원에서 요양을 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재정 상태는 악화됐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1962년 정부가 전통 예술을 보존하기 위해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했으나, 이 대상에서 여성국극은 제외됐다. 그 당시 전통예술계에서 여성국극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당시 한 전통예술 연구사에 기록된 것에 따르면 "여자가 설치면 나라가 망한다. 창극사에 길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임춘앵은 '흑진주'를 끝으로 무대에서 사라졌고, 52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2000년대 여성국극에 대한 평가가 재고되면서 '20세기 대한민국을 빛낸 여성 10인' 중 임춘앵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공개된 임춘앵의 생전 인터뷰에는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냐"라는 질문에 "여성국극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이 내게 비견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라고 답했다.
이를 본 아이키는 "예술을 하고 음악과 춤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다"라며 공감했다. MC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역시 "그가 진정 원했던 수식어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사람들의 애환을 노래했던 멋진 언니'이지 않을까"라고 말해 진한 여운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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