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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과 이재명이 버린 ‘가치와 품격’

입력
2025.02.10 17: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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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이념보다 독선 정치, 품격도 훼손
이, 독단적 흑묘백묘론 또 거짓 가능성
'못난 보수'와 '못된 진보'의 대선 안돼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심판 6차 변론에 출석해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심판 6차 변론에 출석해 눈을 질끈 감고 있다. 뉴시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참 모질고 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살자는 세상에서 어쨌든 살아나가는 것보다 대단한 가치가 뭐가 있다고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심판정에 앉아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안간힘을 쓰는 걸 보면, 공인으로서 정치인의 삶에는 가급적 지켜져야 할 가치나 품격 같은 게 있을 수 있겠다는 걸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노무현은 그런 걸 지켜냈다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유능한 지도자라고 하기엔 미흡했을지 몰라도, 정의로우면서 국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소신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또 진보세력의 괴멸을 막기 위해, 비록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내던지는 미증유의 결단을 실행함으로써 나름 명예를 지켰다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정치판은 가치나 품격을 논하기조차 민망한 잡스러운 인물들의 전성시대인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에서 공정과 상식을 얘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내세웠을 때, 그가 일관된 보수적 가치를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계엄사태에서 드러났듯 무슨 무슨 법사와 선생이 득실거렸던 그의 정치에 건강한 이념적 가치는 없었다. 다른 이들은 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자신의 가족과 정권 핵심세력의 잘못엔 끝없이 관대하고 무심했다.

경제ㆍ사회정책의 모토였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도 이상했다. 자유민주주의든 자유시장경제든 지금은 애초의 고전적 개념들이 충분히 수정ㆍ보완됐음에도 윤석열은 1970년대식 자유민주주의와 고전경제학 시대에 머무른 듯한 자유시장경제 인식을 보여줬다. 그렇지 않고는 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여겨 계엄이라는 돈키호테식 돌격전을 감행한다거나, 양극화 심화에도 불구하고 전방위 ‘부자감세’를 버젓이 강행하는 시대착오를 설명할 길이 없다.

가치와 이념에 기반하지 못한 정치는 최고 권력자의 독선과 권위주의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타협과 절충, 신의에서 우러나오는 정치적 품격은 실종되고 강압적 지시와 투쟁만 남는다. 계엄 과정만 봐도 윤 대통령은 단 한 명의 국무위원으로부터도 지지받지 못한 계엄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끝에 탄핵심판정에서 구차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우리 정치에서 가치와 품격을 훼손하기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수많은 교언과 대국민 거짓말, 표독한 스타일로 정치인으로서의 품격을 적잖이 잃은 사람이다. 유능함을 내세우지만, 적잖은 국민은 11개 범죄 혐의로 4개의 재판이 진행 중인 그가 차기 대선에서 진보 진영의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정도다. 그런 이재명이 이번 계엄사태를 계기로 사실상 조기 대선 출정에 나서면서 자칫 진보 진영 전체의 이념적 가치와 신뢰를 크게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보를 보여 편치 않다.

그가 최근 화두로 꺼낸 ‘흑묘백묘’ 얘기다. 중도 흡수를 겨냥한 정책 우클릭 행보에 나서면서 ‘탈이념, 탈진영’을 내세운 실용주의를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실용적 정책 추구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당의 오랜 이념적 지향에서 크게 벗어나는 정책을 표방하려면 먼저 당내의 의견부터 차분히 수렴해야 한다. 그런 과정도 없이 그저 대중이 혹할 만한 얘기라면 뭐든지 내뱉곤 나중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돌아서는 건 또 하나의 국민 기만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미국에선 파격적 선동가인 트럼프가 끝내 대통령이 됐지만, 우리나라에선 제발 정치 이념에 성실하고 최소한의 품격을 갖춘 정치인이 차기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 지금 그대로의 여야에서 내놓는 대선 후보에게 투표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장인철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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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철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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