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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스 조약 120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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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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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뉴욕 자연사박물관 2층 원형 홀에 설치된 포츠머스 조약 관련 벽화.

뉴욕 자연사박물관 2층 원형 홀에 설치된 포츠머스 조약 관련 벽화.

오래전 미국 뉴욕시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서 느꼈던 씁쓸함이 다시 떠오른다. 매표소가 있는 원형 홀 전면에 포츠머스 조약을 다룬 대형 벽화가 입장객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강화를 주선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미 대통령의 업적(?)을 그린 것이다. 이 조약은 그를 미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로 만들었고,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는 초석이 됐다. 벽화에는 욱일기, 일왕, 일본군이 다른 벽화에는 루스벨트가 러일 관료에게 지시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부터 120년이 흐른 후 비슷한 상황이 재등장했다. 조약 관련국 중 일본이 우크라이나로 바뀐 정도다. 어쩌면 우크라이나는 120년 전 일본이 아니라 조약의 대가였던 조선과 더 가까운 처지인지도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2일(이하 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 후 “양측이 협상을 즉각 개시하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는데, “협상에서 우크라이나는 동등한 일원인가?”라는 질문에 “평화를 이뤄야 한다”고 직답을 피했다.

□이 장면이 “우크라이나는 협상 테이블에 포함되지 않을 것 같다”는 뉴스와 함께 세계로 퍼지며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다행히 14일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JD 밴스 미 부통령이 종전 방안을 논의하며, 우크라이나 배제 우려가 가라앉았다. 이 회의에 러시아는 초대받지 못했다. 하지만 수일 내 사우디에서 미·러·우크라 3자 회동이 열릴 예정이어서, 종전협상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이번 종전협상에서 우크라이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것이란 우려는 여전하다. 전쟁 이전 국경 복귀나 항구적 평화 보장 방안 같은 우크라이나의 요구 수용 대가로 트럼프 정부는 우크라이나 매장 희토류의 50% 지분을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우크라이나는 일단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군 주둔이 보장되면 양보할 가능성도 작지 않다. 러일전쟁에 개입해 약소국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대신 필리핀을 확보했던 120년 전 미국 제국주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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