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호의 시공탐방

영어에 미쳤던 시절, '기러기 아빠' 위해 세운 영어마을

온 나라가 영어에 미쳐 있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공용어인 영어의 중요성은 현재도 물론 작지 않지만 당시에는 모든 정책이, 모든 역량이 영어에 집중됐다. 1990년대의 키워드가 ‘닷컴’이었다면 2000년대의 키워드는 ‘글로벌’이었다. 오죽하면 유력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의 제1공약이 ‘영어마을 설립’이었고, 차기 대권 후보로 꼽히던 서울시장과 경기지사가 ‘누가 더 영어마을을 빨리 여느냐’로 경쟁했다. 영어마을 광풍이 지속되면서 새롭게 탄생한 마을들은 '영어 잘하기'의 꿈을 반영하듯 점점 환상적인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진화를 거듭했다. 이국적인 건물과 외국인 직원들이 상주하는 ‘정주’형 영어마을을 처음 선거판에 올린 것은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한 손학규 당시 한나라당 경기지사 후보였다. 이후에도 손 지사의 역점사업으로 자주 거론될 만큼 중점사업으로 다뤘고, 이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1999년 1,839명에 불과했던 조기(초·중·고 재학) 유학생은 2000년 들어서 4,397명으로 139% 폭증했고 3회 지방선거가 치러진 2002년에는 1만 명을 돌파하며 3년 만에 5배가 늘었다. 영어마을의 대표격인 파주영어마을이 개원한 2006년에는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해 2만9,511명의 학생이 해외 유학을 떠났다. 이 때문에 가족들을 유학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생활비를 송금하는 ‘기러기 아빠’가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지금 보면 ‘왜 만들었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는 영어마을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낳은 발상이었다.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대신 국내에 ‘작은 외국’을 만들어 조기유학 수요를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 당선된 3기 민선 지방자치단체장들은 경쟁적으로 영어마을 설립을 추진했다. 가장 많은 학생 수요가 있는 서울시와 경기도는 서로 더 빠른 시일에 영어마을을 개원하기 위해 월 단위로 새 계획을 추진했다. 당초 경기도는 파주시 통일동산을 제1호 영어마을 부지로 확정해 2006년 개원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서울시는 강북구에 첫 영어마을을 건립할 부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명박 시장이 송파구 풍납동 옛 외환은행 합숙소를 리모델링해 2005년 10월 영어마을 운영을 시작할 계획을 발표했다. 영어마을 사업의 후발주자인 서울시가 신규 건립보다 시간이 절약되는 리모델링을 택해 선수를 둔 것이다. 이에 질세라 경기도는 안산시 공무원수련원을 영어마을로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개원 시기를 서울보다 두 달 빠른 8월로 정했다. 2004년 하반기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와 서울영어마을 풍납캠프가, 2006년 처음부터 영어마을 용도로 지어진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와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가 개원하며 본격적인 영어마을 시대가 열렸다. 서울과 경기를 시작으로 전국에 28곳의 영어마을이 세워졌다. 야심 차게 운영을 시작한 영어마을은 초기부터 적자 논란에 시달렸다. 안산영어마을은 개원 첫해 118억 적자를 기록했고, 규모가 더 큰 파주영어마을 역시 159억 원의 적자로 운영을 시작했다. 경기영어마을 대비 두 배 비싼 이용료 책정을 감수하고 민간위탁운영을 택한 서울영어마을마저도 2006년 두 캠프 통합 7억 원의 적자를 냈다. 하필 2006년에 정점을 찍은 조기유학 열풍이 이후 꾸준한 감소세로 전환하고 단기형 숙박교육의 효용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며 주 수입원인 숙박교육 수요가 떨어졌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파주영어마을의 경우 2007년 3만3,209명의 숙박교육생이 입소했지만 2008년에는 2만7,841명, 2009년에는 1만5,000여 명으로 수요가 감소했다. 영어마을 설립 경쟁에 불을 지핀 영어 광풍이 외국어고등학교 등 특목고 입시 경쟁에도 불을 지폈다. 기존 외고의 경쟁률이 치솟고 2004년에서 2010년 사이 전국에 무려 10곳의 신규 외고가 개교했다. 학생들은 영어마을 대신 특목고 입시학원으로 더 몰렸다. 영어 광풍에 세워진 영어마을이 영어 광풍에 쓰러진 셈이다. 경쟁적으로 영어마을을 세우던 두 지자체장이 4회 지방선거에서 교체되자 영어마을은 사실상 정책적 동력을 잃었다. 신임 경기지사로 당선된 김문수는 선거 당시부터 영어마을 직영 포기를 시사했다. 서울과 달리 낮은 요금을 고수하며 영어마을을 공교육의 일환으로 취급했던 경기도에도 큰 변화가 예고됐다. 영어마을 시대를 열었던 경기영어마을은 수차례 이용요금을 인상하고 직원을 정리해고 하는 등 고강도의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만성 적자를 면치 못했다. 비용절감 차원에서 매점 등 비교육 업무에 종사하는 원어민 직원을 내국인 근로자로 대체해 강의실에서만 영어교육을 제공해 ‘몰입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시설 이용 만족도를 떨어뜨려 다시 이용객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발생시켰다. 결국 ‘1호 영어마을’ 안산영어마을과 아직 개원도 하지 않았던 양평영어마을은 김문수 도정하 민간위탁으로 넘어갔다. 파주영어마을은 공교육 취지를 고려해 직영으로 존치했다. 2012년 안산영어마을 폐원을 시작으로 전국 영어마을은 하나둘 문을 닫거나 새 용도로 변경됐다. 파주·양평영어마을은 현재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 소속 ‘경기미래교육’ 파주캠퍼스와 양평캠퍼스로 바뀌어 기존에 제공하던 영어교육과 더불어 진로·창의·인성교육과 가족화합캠프, 시민교육 등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연주 경기미래교육 양평캠퍼스 행정팀장은 "초창기에는 청소년이 주 교육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가족 단위로 오는 소통캠프나 어르신들이 오는 힐링캠프, 지역 주민 누구나 올 수 있는 주말 축제도 같이 운영하고 있다"고 영어마을의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서울 관악·노원, 경기 수원·군포, 경북 칠곡의 영어마을 역시 평생교육과 창업 관련 시설로 변해 시대에 맞는 새 간판을 달았다. 2022년 운영을 중단한 서울영어마을 수유캠프는 아직 활용 방안을 찾고 있다. 'English Only(영어만 사용)'라고 적힌 영어마을에 들어선 VR·AR(가상·증강현실) 체험장 드론 축구장이 변한 시대를 말해주고 있다.

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지금도 설레는 핑크뮬리와 첨성대

가을 햇살에 곱게 물든 경북 경주 첨성대 인근에는 핑크뮬리밭이 있다. 그곳을 거닐고 있노라면 잊고 있었던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첨성대 주변을 둘러싼 핑크빛 물결은 마치 꿈결 같고, 저 멀리 보이는 첨성대는 유년 시절의 설렘을 되살려 놓는다. 어린 시절, 처음 첨성대를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책 속에서만 보던 신라시대의 건축물을 바로 앞에서 보니, 경외감과 자랑스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 조상들의 천체 관측 기술과 지혜에 놀랐고 역사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유적지를 찾은 학생들 중 상당수는 스마트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듣는다. 표정에는 경외감이나 새로운 사실을 알아간다는 진지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역사 현장에서 느껴야 할 감동보다는 지식 암기에만 집중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 목요일은 수능일이다. 올 한 해 열심히 공부하느라 지친 수험생들은 수능을 마친 후 시간을 내어 역사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한 역사 유적지를 탐방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선조들의 지식과 경험을 느낄 기회를 가져보자. 역사 현장에서 얻는 감동은 역사책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훨씬 커 청소년들의 인격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내 어린 시절, 나보다 몇십 배 큰 첨성대를 보고 느꼈던 경이로움. 과거의 그 아름답고 짜릿했던 추억이,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국일보 70년·70대 특종

<52> 통진당 해체, 이석기 녹취록(2013)

이석기 녹취록 특종(2013년 9월 2일 자)은 한국일보 70년 역사에서 ‘낭중지추’의 사례로 꼽힌다. 경영난과 그에 따른 갈등으로 58일간 편집국이 폐쇄되는 사태를 겪었지만 진실을 향해 굽히지 않는 의지와 기자정신은 결코 훼손되지 않았음을 증명한 특종이었다. 이날 한국일보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이 참석한 이른바 지하혁명조직(Revolution Organization·RO)의 5월 12일 회합 녹취록 전문(A4 62쪽 분량)을 9월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전재한다"고 밝혔다. 또 8월 30일 자에 요약본을 보도한 뒤 전문을 추가 공개하게 된 배경도 설명했다. “전문 공개 요구가 높고 녹취록의 진위 및 내란음모 혐의 적용의 타당성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어 독자 여러분께 객관적인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전문 공개를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언론계 주변에서는 한국일보가 온라인에 공개한 요약본을 일부 경쟁지가 인용하고서도 자신들의 특종인 것처럼 주장하자, 확실한 차별화를 위한 조치라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일보는 이 특종을 다루면서 불편부당의 힘을 보여줬다는 평가도 받았다. 통합진보당이 사실과 다르다고 강력하게 반발하며, 해당 기사의 온라인 삭제를 요구했으나 진실의 힘은 한국일보의 편이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재판장 강형주 수석부장판사)는 이석기 의원 등 10명이 인터넷한국일보를 상대로 낸 게시 기사 삭제 및 게시금지 가처분 신청(2013카합1931)을 기각했다. 당시 재판부는 "한국일보의 보도는 객관적으로 국민이 알아야 할 공공성, 사회성에 관한 사안을 다룬 것이고 기사의 게시를 통해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 보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이 의원 등의 인격권을 보호해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크다"며 "분단과 휴전 상태라는 대한민국의 특수상황과 이로 인한 국가안전 보장에 대한 국민적 불안과 사회적 관심의 정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하면 이 기사는 공적인 관심사, 특히 정치적 이념과 전쟁 시의 대처 방안 등에 대한 발언을 다루고 있어 보도할 가치가 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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