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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세계

'위대하다'는 미국의 '쪼잔한' 민낯

계엄, 탄핵, 체포, 내란죄 기소, 구속 취소. 가슴 답답함이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인다. 미국 상황도 다르지 않다. 불법이민자 추방, 광범위한 관세 전쟁, 연방 공무원 대폭 감원 및 정부기관 폐지,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설전. 지난 두 달, 매일매일 롤러코스터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첫째, 정당 양극화 수준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지, 공화당 지지자 절대다수는 박수를 치고 민주당 지지자 절대다수는 쌍욕을 날린다. 건설적 토론 따위는 이제 없다. 둘째, 극단적 소수가 정부와 정책에서 과대 대표되고 있다. 인구가 작은 주들이 연방상원에서 지나친 힘을 행사하고, 정치자금 제한이 거의 없어서 초부유층 입김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념적으로도 진보와 보수 양방향의 극단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각각 장악했다. 미국인의 다수는 중도적인데도 말이다. 셋째, 인종 간 갈등과 불평등이 치유 불가능이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이 서로 다른 곳에 살면서 자신의 문화만을 즐긴다. 다른 종류의 직업을 가지니 소득 차이는 더 심해지고,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각박해졌다. 하지만 정치는 해결이 쉽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넷째, 개혁과 변화가 느리다.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다른 방향의 개혁을 꿈꾸고, 의회나 대통령이 뭔가 밀어붙이면 반대진영은 법원을 이용해 제동을 건다. 민주, 공화 누가 집권하든 똑같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새로움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미국인들은 저마다의 옛날을 그리워한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이변'이라고 생각했었다. 이후 공화당과 그 지지자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 보수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었다. 2020년 트럼프 대통령 낙선을 보았으며, 민주당이 느끼는 위기의식과 변화의 방향이 다르다고 우려했었다. 2024년 화려하고 강력한 트럼프의 귀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미묘하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이 맞는지 또다시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미국을 오가고 있는데, 정작 미국 정치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선망은 여전하다. 미국은 그런 한국을 조롱이라도 하듯 "위대한 미국"을 외치면서 쪼잔한 미국의 민낯을 자랑스럽게 내비친다. 2020년 2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이곳에 글 쓰던 일을 이제 그만두면서 그저 넋두리만 늘어놓게 된다.

기고

신약 있는데, 이식 수술 강요받는 아기 환자들

국내에만 1,300개 넘는 희소질환이 있다. 이 중 치료가 가능한 희소질환은 극소수라 어쩌다 들리는 신약 소식은 가뭄 속 단비처럼 매우 반갑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가 처음 시도한 '허가-급여-약가협상 병행 시범 사업'은 환자를 위한 치료 약제의 신속한 접근성 강화를 지원하는 혁신적 제도로 대단히 환영한다. 이 시범사업 1호 대상으로 '진행성 가족성 간내 담즙정체증', 즉 피픽(PFIC)이란 유전성 희소질환과 그에 대한 유일한 신약 '오데빅시바트'가 동시에 선정됐다. 피픽은 국내에만 약 40명 극소수 소아들에게 심각한 간 질환을 유발한다. 태어나자마자 극심한 가려움증으로 온몸에 피딱지가 앉을 정도로 매일이 고통의 연속이다. 적절한 치료 없이는 급작스럽게 간경변, 간경화, 간암으로 진행될 수 있다. 돌도 지나지 않아 간 이식수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 적용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오데빅시바트가 실제로 환자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외국에서는 진단만 되면 세부 아형, 임상적 조건 관계없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피픽 진단 환자가 워낙 극소수이고 어린아이들의 병변이 언제 급격히 악화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간 수치, 소양증(가려움증) 등 여러 조건을 동시에 만족했을 때만 건강보험을 지원한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키는 환자는 전체 환자의 10%나 될까. 희소질환일수록 어떤 잣대로 치료가 돼야 하는가를 즉각 명확하게 증명하기 어렵다. 피픽도 개인차이가 커 가려움증이 반드시 심하다고 할 순 없다. 게다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영아는 소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정말 가렵더라도 스스로 긁는 행위로 표현할 수 없다. 간 수치도 수치 자체뿐 아니라 간의 손상 여부를 신속하게 체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반적인 간 질환과 달리 간경변 진행 속도가 더 빠를 수 있어서다. 즉 의사는 희소질환 보험 조건보다 환자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치료법을 택한다. 물론 정부의 우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피픽은 연간 2, 3명 발견되는 초희소질환이다. 너무 어려 간이식 수술조차 어려운 환자에겐 이 신약이 유일한 대안이다. 또한 수술을 하더라도 평생 합병증 우려에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하며, 거부반응이나 감염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약을 먹는다면, 정상 생활을 영위하며 성장할 수도 있을 소아 환자가 보험 조건을 맞추지 못해 간이식 수술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정부는 신약의 환자 접근성을 강화하는 시범 사업 본래 취지를, 제약사는 단순한 이익보다 도움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필요한 약을 공급한다는 역할을 고려하길 바란다.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해 환자들을 위한 좋은 결론을 도출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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