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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우리가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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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질문하는 동물이다. 신과 자연과 인간이 안긴 불행 앞에서, 인간은 묻고 또 물어왔다. 끝없는 물음은 얼핏 헛되어 보이지만 이보다 변화무쌍하고 강력한 무기는 없다. 인간에겐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악착같이 질문할 자유가 있다.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회상록을 썼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이야기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제목으로 감쌌다.
‘잊지 않겠습니다’는 지난 1년 동안 세월호 참사 관련 행사에서 가장 많이 외친 구호다. 생략된 목적어는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일 테고, 불법과 부패로 점철된 사실들일 것이다. 떠올려보라, 1년 전 4월 16일 당신에게 각인된 풍경들을! 적어보라, 그 사건과 이어진 추악한 단어들을! 여전히 많은 부분이 또렷하지만 어떤 장면은 흐려졌고 검은 구멍으로 바뀐 곳도 있다. 망각은 힘이 세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만으론 부족하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이 팽목항을 다녀갔다. 나도 가을에 진도 앞바다에서 이틀 밤을 보냈다. 노란 리본 가득한 그곳은 질문의 바다였다. 항구의 불빛을 등진 사람들이 통곡과 분노와 그리움으로 쏟아낸 물음들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내 귀로 밀려들었다.
유언(流言)이니 비어(蜚語)니 하며 질문을 틀어막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광화문 일대를 제외하곤 때론 너무 조용하단 착각까지 일었다. 그 새벽 팽목항을 거닐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질문은 막히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가장 하찮은 것에서 가장 소중한 것까지, 가장 북받치는 것에서 가장 아리는 것까지 퇴적층을 이룰 만큼 충분히 두꺼웠다. 질문이 멈추면 기억도 멈춘다는 것을, 출렁이는 바다를 보는 순간 모두 직감한 것이다.
한편으론 새로운 걱정이 시작되었다. 팽목항에 묶여 흔들리는 수천 개의 리본처럼, 맹골수도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뭇별처럼 질문이 너무 많았다. 두서 없는 질문은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법. 질문들이 힘을 얻고 빛을 뿜기 위해선, 핵심 질문을 가려 건져 뭉쳐야 한다.
일찍이 장편 작가들은 거대한 불행을 향해 간절한 질문을 던져왔다. 질문을 얼음송곳처럼 깎고 쇠망치처럼 단련하기 위해 몇 달 혹은 몇 해를 보냈다. 질문이야말로 이야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임을 아는 것이다. 수천 개의 질문이 얽히고설켜 벽을 쌓고 성을 만든다. 충분히 검토한 무수한 질문을 딛고 일어선 후에야 비로소 가장 중요한 물음이 망루에서 깃발로 휘날린다. 그 깃발의 핵심 단어가 작품의 제목으로 올라서기도 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대표적이다.
2014년 4월부터 두 달 남짓, 나 역시 세월호 참사를 품고 설명하기 위한 물음을 찾아 헤맸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끔찍한 불행을 나만의 문장으로 옮겨보고 싶었다. 이미 나온 질문들을 모아 ‘질문록’으로 정리했고 제시된 답도 함께 옮겨 적었다. 이 과정에서 발견하여 내 방식대로 벼린 질문은 모두 셋이다.
첫째, 생명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생명보다 존귀한 것은 없다고 배우며 자란다. 부귀영화도 생명 앞에선 지극히 하찮다. 그러나 역사를 잠시만 훑어도 수많은 생명이 한 순간에 사라진 대목과 맞닥뜨린다. 홍수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 페스트로 대표되는 돌림병에 의한 피해도 막대했지만, 인간이 만든 국가와 공동체 속에서 벌어진 참사도 적지 않았다. 전쟁과 테러는 물론이고, 비행기 추락이나 선박 침몰도 잇달았다. 무엇이 존귀한 생명들을 한 순간에 앗아가는가. 대형 참사를 가능하게 만들거나 앞당긴 인간의 탐욕은 어디서 싹이 나고 어떻게 자라는가. 그 모든 불의에 맞서서 생명을 지킬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생명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는 이데올로기나 제도나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둘째,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이 물음은 죽은 자들의 존엄성을 지키는 문제와 산 자들의 존엄성을 지키는 문제로 다시 나뉜다. 먼저 죽은 자들의 존엄성을 보자. 304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 9명의 실종자가 차디찬 수중에 있다. 망인들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선 어찌 해야 할까. 단원고 희생자들의 초상화를 계속 그려온 박재동 화백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누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은 살아 있더라도 내겐 죽은 것이다. 누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계속 그 사람에게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린 단원고 아이들은 내 가슴엔 살아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법은 복잡하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 그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적는 것, 그 삶과 꿈에 관심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4ㆍ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유가족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채록하는 일이나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이 힘을 합쳐 ‘아이들의 방’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는 것 역시 이런 노력에 속한다.
산 자들의 존엄성 회복도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다. 대한민국 국민 중 상당수가 침몰하는 세월호를 생중계로 보았으며, 참혹한 소식을 접하면서 크든 작든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죄책감과 슬픔과 안타까움이 뒤엉킨 내상(內傷)을 치유하려는 지속적인 활동이 이어져야 한다. 치유 공간 ‘이웃’을 비롯한 단체들이 소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어떻게 이 고통을 극복하고 다른 인간으로 거듭날 것인가.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육체의 아픔뿐만 아니라 고통을 낳는 감정 역시 그대로 두고 시간을 끌면 대부분 외면할 구실을 찾게 된다. 고통을 비극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극은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고통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강건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어려움을 견디고 극복하여 ‘다른 인간’으로 바뀌는 서사인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과연 시를 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유대인 학살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체험한 인류가 그 문제를 통렬히 반성한 뒤 거듭 날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 동격이다. 그 물음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지난 1년 동안 더 나은 인간의 모습을 보인 이들은 세월호 유가족이다. 망극한 불행을 당해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임에도, 그들은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걷고 말하고 쓰면서 함께 나아왔다. 참사가 터지기 전까진 민주공화국의 평범한 국민이자 일상에 충실한 시민이면서 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였다. 사건 직후 그들은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회의하여 모임을 꾸리고, 터무니없는 모략과 선동 앞에서도 침착하게 인내하며, 돈과 시간으로 원칙을 흐리려는 자들에게는 단식을 비롯한 여러 방식으로 강력히 항의하면서, 하루하루 꽉 찬 삶을 살았다. 특별한 사람만이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등이 휠 것 같은 고난에 진심으로 맞선 유가족에게서 나는 인간의 품격을 느끼고 배웠다.
거리의 노란 리본들이 겨울비에 젖고 북풍에 찢겨 더러워질 즈음 개나리가 피기 시작했다. 희생자를 기리던 작은 리본은 이제 광화문이나 팽목항 혹은 경기도 안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봄꽃이 피는 방방곡곡에서 노란 빛을 뿜어냈다.
인간의 시간 인식은 상반된 측면이 있다. 한 번 흘러가버리면 다시 오지 않는다고도 하고, 다시 그 아침 그 봄이 돌아왔다고도 한다.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으로 반복을 설명할 수도 물론 있지만, 올해 4월엔 조금 다른 생각을 덧붙여본다.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그 아침과 그 봄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지나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더 잘 기억할 기회를 남은 우리들에게 주려는 자연의 섭리라고.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사료를 살피다 보면, 한 인간에 대한 기록이란 크게 세가지 뿐임을 알게 된다. 첫째는 그 자신이 남긴 기록이다. 유품까지 포함하여 그가 생전에 몸과 마음으로 활동한 결과물을 정돈하여 모을 필요가 있다. 둘째는 그를 알던 지인의 기록이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 선후배 등이 모두 포함된다. 삶을 함께 꾸린 이들을 찾아서 그때 그 순간의 언행을 옮겨둬야 한다. 사람 됨됨이에 대한 회고 역시 독특한 개성을 묘사할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나 국가의 공식 기록이다. 공적인 활동을 했다면 공식 기록을 통해 그 면면을 찾아야 하며, 공적인 역할을 맡지 않았다고 해도 중요한 사건에 참여하거나 평가 받을 부분이 있다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을 예로 든다면, ‘삼봉집’이 첫 번째 기록이고, 정도전과 함께 세월을 풍미한 정몽주, 이숭인 등의 문집에 담긴 정도전의 행적이 두 번째 기록이며,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는 정도전의 언행과 평가가 마지막 기록이다.
자발적인 시민이나 민간단체에 의해, 세월호 참사의 물증을 확보하고 기록을 모으는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물증과 기록을 모으는 것과 질문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더 많이 모으면 더 많이 질문하게 되고, 더 많은 질문을 쫓다 보면 더 많은 기억을 찾아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과 시민공동체에서 쌓아온 지난 1년의 노력을 이제 국가 차원에서 취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할 때가 되었다. 새롭게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조사 역시 국가가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정권의 잘잘못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존망의 문제다. 민주공화국은 주권자인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국가체제이기 때문이다.
4ㆍ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안타깝게도 본격적인 활동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를 몇 개의 단어로 규정하는 것보다 성급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다. ‘단순한 교통사고’라거나 ‘불운’ 따위는 마지막에 들먹여도 늦지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1년 동안 제기된 질문과 확보한 물증과 모은 기록을 펼쳐놓고, 그 속에서 참사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물증인 세월호를 반드시 인양하여 명명백백하게 공개한 후 전문가의 정밀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 망자의 최후가 몸에 남아 있다는 시신 검안의들의 주장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침몰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해소할 중요한 단서가 세월호 선박 그 자체란 것은 상식이다.
단원고 희생자들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단테가 쓴 ‘신곡’의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다.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모두 별을 언급하며 끝난다. 지난 1년 우리는 가여운 영혼들이 사라진 바다를, 아픈 질문을 쏟아내며 들여다보았다. 절망의 끝 울분의 끝 사무침의 끝이 거기에 있었다. 별을 보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야 한다. 아이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서 별이 되었다는 문장은, 그 하늘 아래에서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봄 바다에서 밤하늘까지 들여다보고 올려다보자. 외면하는 짐승이 아니라 질문하는 인간이 되자.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핵심 질문을 만들어 끈질기게 묻고 또 묻자. 글로도 묻고 그림으로도 묻고 노래로도 묻자. 어제를 반성하고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준비하자. 그렇게 고투하며 쌓은 시간을 장편 작가들은 소설의 아름다운 육체라고도 불렀다. 물음을 쥐고 답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만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는 방법이며, 우리가 다른 인간으로 거듭 나는 길이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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