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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 2배 초과한 채, 깡그리 무시된 안전

입력
2015.04.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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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TSㆍ해운조합 운항관리실 등 안전 소홀로 세월호 출항 못 막고

선장은 위험구간서 조타실 안 지켜

현장 출동한 해경은 선원 먼저 구조, 배 회복 불능 되어서야 진입 지시

잠수요원들 헬기 없어 뒤늦게 합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은 부푼 마음이었다. 감귤 농사를 지으러 이사 가는 일가족과 십수년 만에 새 차를 구입해 집으로 향하는 화물트럭 운전기사, 환갑 기념 단체여행길에 오른 인천 용유초 동창생들도 설렘이 가득했다.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한 승객 443명과 선원ㆍ승무원ㆍ아르바이트생 33명 등 476명이 탄 여객선 세월호는 2014년 4월 15일 오후 8시59분 인천항을 떠났다. 해양안전심판원의 ‘세월호 전복사고 특별조사보고서’에는 출항시간이 오후 9시5분으로 기록됐다. 이는 당초 예정보다 2시간30분 가량 늦은 시각이었다.

이날 인천항에는 짙은 안개가 끼었다. 오후 5시35분 시정주의보도 내렸다. 덕적도행 연평도행 등 다른 연안여객선들의 운항은 모두 취소됐다. 세월호만이 안개가 걷히길 기다렸다. 시정주의보는 오후 8시35분 해제됐으나 시정은 여전히 짧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석현 의원에 따르면 이날 오후 9시 기준 인천항 인근 시정은 인천항 해상교통관제센터(VTS) 1.6㎞, 한국해운조합 운항관리실 500㎙ 이상, 인천기상대 800㎙로 관측했다. 해사안전법에선 시정이 1㎞ 이내이면 출항이 통제된다. 운항관리실이나 인천기상대 관측대로라면 세월호는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세월호 유족 법률대리인 박주민 변호사에 따르면 이날 단원고에선 안개 지연에 따라 수학여행을 갈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터미널에서 대기하던 학생들은 결국 다른 승객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시정주의보가 유지된 오후 7시20분쯤이었다.

여객선 운항안전 관리를 맡은 해운조합 소속 운항관리자는 세월호 출항 직전에도 운항관리실 사무실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현장에서 승객수, 화물 등을 점검해야 했지만 운항관리자는 세월호에서 100㎙ 넘게 떨어진 사무실에서 망원경만 들여다봤다. 해양경찰도 현장에 없었다.

세월호의 화물 적재 한도는 1,077톤. 하지만 세월호는 당시 2,142톤의 화물을 실었다. 1,065톤이 초과됐지만 운항관리실은 까맣게 몰랐다.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 복원성 유지에 필수적인 평형수, 연료 등을 1,000톤 가까이 뺀 사실도 나중에야 밝혀졌다. 컨테이너, 차량 등 고박 상태도 엉망이었다. 출항 전 점검보고서는 세월호가 떠난 후 이준석 선장이 무선으로 불러준 내용을 운항관리자가 대리로 작성했다. 이 선장이 출항 시 밝힌 승선인원은 474명이었고 화물은 일반화물 657톤, 자동차 150대가 전부였다. 전부 엉터리였다.

뱃머리만 남긴 세월호
뱃머리만 남긴 세월호

오후 9시30분. 학생들은 세월호 3층 중앙로비에 모여 레크리에이션 강사와 함께 게임을 하고 선상에서 불꽃놀이도 즐겼다. 이 모습은 검찰이 광주지법에 증거로 제출한 선내 폐쇄회로(CC)TV 영상에 담겨 있다. 학생과 다른 승객들은 다음날인 16일 오전 8시를 전후해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고 아침식사를 마치고는 로비나 객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그 시각 조타실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양안전심판원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30분부터 조타실은 1등항해사로부터 당직을 인계 받은 3등항해사와 조타수가 지켰다. 폭이 5㎞ 남짓으로 좁고 조류가 빠른 맹골수도를 통과하기 1시간 전쯤이었다. 세월호를 탄 지 4개월 밖에 안 된 3등항해사는 맹골수도를 항해한 경험이 없었지만 이 선장은 8시15분쯤 조용히 조타실을 떠난다. 협수로 등 위험구간에선 선장이 직접 지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선원법을 무시한 것이다. 검찰이 확보한 CCTV 영상에는 이 선장이 오전 8시37분 조타실에 들어갔다 4분만에 나오는 장면이 담겨 있다. 검찰은 이 선장이 조타실을 지킨 것은 이 시간이 전부였다고 설명했다.

이날 8시27분 맹골수도에 진입한 세월호는 약 19분 뒤 병풍도를 오른쪽에 두고 변침을 시작한다. 3등항해사가 조타수에게 키를 135도에서 140도로 꺾을 것을 지시했다. 애초 145도로 변침해야 하지만 배 복원성이 좋지 않아 방향 전환은 순차적으로 해야 한다는 다른 선원 말을 숙지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2분 뒤 항해사 지시에 따라 5도를 추가로 돌린 뒤 문제가 발생한다.

“어, 어. 안 돼.”. 조타수는 배 앞머리가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돌면서 선체가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순간 키를 좌측으로 꺾었지만 애초 키를 항해사가 지시한 각도 이상으로 돌린 터라 이미 배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8시50분 화물칸의 화물이 쏠리면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선수 갑판의 컨테이너가 미끄러져 바다로 추락했다. 배가 순식간에 기울자 항해사 등 선원들은 우왕좌왕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이날 8시52분 최초 신고자는 단원고 학생 최덕하(사망)군이었다. 119상황실은 곧바로 목포해경을 연결해 3자 통화를 했는데 해경은 엉뚱하게 경도 위도를 물어보며 시간을 허비했다. 세월호의 이상 징후를 가장 먼저 파악했어야 할 진도 VTS는 9시6분이 돼서야 해경으로부터 사고 소식을 들었다. 이 시간 세월호에선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방송이 반복됐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닷새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416 가족협의회 등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등 관계자들이 세월호 선체 인양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지를 촉구하며 경찰과 대치하던 중 경찰 병력이 참가자들에게 최루액을 뿌리고 있다. 뉴시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닷새 앞둔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416 가족협의회 등 세월호 참사 유가족 및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등 관계자들이 세월호 선체 인양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폐지를 촉구하며 경찰과 대치하던 중 경찰 병력이 참가자들에게 최루액을 뿌리고 있다. 뉴시스

9시30분 현장에 도착한 100톤급 해경 경비정 ‘123정’은 현장지휘함으로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승선인원이 10명뿐이고 상황보고를 위한 기본 장비도 없었다. 선내에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진입 시도나 퇴선 유도 방송도 하지 않았다. 갑판 위 사람들만 실어 날랐고 9시44분엔 이 선장 등 선원들을 먼저 구조했다. 그 사이 배 기울기는 57도를 넘어 회복 불능이 됐다. 어선을 끌고 나온 어민들만 발을 동동 굴렀다.

9시47분 123정 대원들에게 “선내에 진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좌현이 완전히 침수됐다. 10시6분 123정 대원들은 3층 객실 유리창을 깨고 마지막 구조를 벌였다. 그런데도 해경청은 “자체 부력이 있으니 차분하게 구조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지시를 10시14분쯤 내렸다. 기울기는 108도를 넘어갔고 11시18분 세월호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잠수가 가능한 특공대원들은 헬기를 못 구해 민간어선을 타고 오느라 그제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목포해경 122구조대도 12시19분에야 나타났다.

급변침 후 2시간30분만에 뒤집힌 세월호는 이틀 뒤 선수마저 바닷속으로 가라 앉았다. 해경ㆍ군ㆍ민간 등이 총동원돼 수색ㆍ구조작업을 벌였지만 295명이 숨졌고 실종자 9명은 여전히 바다에 잠들어 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이환직기자 slamh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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