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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돈 상자 변천사

입력
2015.04.15 17:52

문민정부 시절인 1996년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하던 검찰이 서울 중구 쌍룡그룹 본사 압수수색에 나섰을 때다. 쌍용양회 경리창고에서 1만원권 현금 다발이 가득 찬 사과상자 25개가 발견됐다. 모두 61억원. 사과상자가 현금보관, 뇌물 전달용으로 유용하다는 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였다. 1997년 수서비리 사건 당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사과상자 1개에 2억4,000만원, 라면상자 1개에 1억2,000만원씩을 넣어 뇌물을 뿌렸다.

▦ 부정한 돈 전달에 상자와 같은 용기(容器)가 등장한 건 문민정부 출범 직후 실시된 금융실명제 때문. 차명계좌나 고액수표 주고받기가 어려워지자 거액 현금을 자연스럽게 건넬 수단이 필요했다. 한보 정 회장은 현금 사과상자를 전달하면서 “아주 특별한 사과니까 잘 드시라”고 암시했다고 한다. 현금 사과상자의‘끝판왕’은 2002년 대선 때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이다. 한 대기업이 사과상자에 넣은 현금 150억원이 실린 트럭째로 첩보작전 하듯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나라당에 전달했다.

▦ 사과상자가 유명세를 타면서 은밀한 현금전달 용기로서의 효용이 떨어지자 대체품이 등장했다. 골프 캐디백과 보스톤백, 007가방 등이다. 골프 캐디백에는 골프채가 있는 상태에서도 1만원권 2억원 정도가 들어간다. 2001년‘진승현 게이트’때 선보였다. 최근 각 지역의 특산물 판매가 활성화하면서 굴비상자, 안동 간고등어, 상주곶감 상자가 각광을 받고 있다. 간고등어 상자에는 1만원권 3,000만원, 곶감상자에는 2,000만원, 굴비상자에는 1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 5만원권 등장은 전달 용기의 소형화, 경량화, 다종화를 가능하게 했다. 이번에‘비타500’박스 등장은 돈 전달 용기의 변천이 무궁함을 잘 보여준다. 비타500 10개입들이 규격은 가로 세로 높이 23,9,14㎝. 여기에 5만원권을 가득 채우면 8,000만원 정도 들어간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회장이 2013년 4ㆍ24 재보선 때 3,000만원을 여기에 넣어 이완구 후보에게 건넸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박스의 3분1 정도 찼을 것이다. 진실은 아직 모르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돈 상자의 진화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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