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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 트라우마 앓는 대한민국… '반목의 상처' 또 경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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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공방에 사회적 피로감
일부 보수단체 등 비뚤어진 행동
우리 사회 대립·혼란만 가중시켜
"진상 규명·책임 추궁 확실히 해야
참사 재발 방지책 나올 수 있고
아픔 딛고 서는 공동체 되찾아"
지난해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배가 가라앉는 장면과 단원고 학생들이 침몰 직전 선실의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반복적으로 접한 대다수 국민들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사고 발생 이후 침몰까지의 과정을 뉴스 영상으로 지켜보면서도 승객들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점과 희생자의 상당수가 수학여행을 떠난 고교생이란 점에서 심리적 몰입과 충격이 컸다.
세월호 트라우마는 비단 생존자와 유가족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대형 재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인 특유의 정(情) 문화와 높은 공감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보수ㆍ진보의 정치적 대결이 심화되면서 우리 사회는 아픔을 치유할 새도 없이 반목과 혼란만 반복되고 있다.
악의적 비난과 회피…트라우마 발현
“누가 지들보고 놀러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으랬나. 왜 저 XX들이냐.”
최근 택시를 타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모여 있는 광화문 광장을 지나던 직장인 김인숙(32)씨는 택시 기사가 내뱉은 말에 충격을 받았다. 김씨는 “갈수록 세월호와 관련된 막말이 심해지는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참사 초기만해도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를 한마음으로 애도했던 여론 중 일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비뚤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9월 단식중이던 세월호 가족대책위 농성장 옆에서 폭식 투쟁을 벌였던 일간베스트(일베) 회원들이 대표적인 예다. 일부 보수단체들도 국정혼란, 세금 낭비 등의 이유로 세월호 인양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기선완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기본적인 신뢰와 투명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높은 실업률 등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를 세월호에 투영해 표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조건 잊으라고 한다고 잊혀지는 게 아닌데, 진상규명이라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문제가 커진 측면이 있다” 지적했다.
세월호 관련 소식을 아예 회피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주부 유지인(37)씨는 지난해에는 세월호 관련 뉴스를 챙겨보며 누구보다 안타까워했지만 진상 규명 등 여러 문제 해결이 지지부진하자 최근에는 관련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유씨는 “옅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슬픔과 충격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며 “희생자 가족들이 다시 거리로 나선 것도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 아니겠냐”며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성토했다.
진상규명 문제가 정치적 공방으로 번지면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사안을 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 잘못된 정보도 계속 유통되고 있다. 주부 이희숙(61)씨는 “세월호로 수억원씩 보상을 받았으면 된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정부가 배ㆍ보상금액 추정치를 발표한 것을 실제 지급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인천의 중학교 국어교사 한여진(36)씨는 “일베 사이트를 통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접하고, 희생자를 비하하는 아이들이 있어 우려된다”며 “학교에서도 언급을 자제하는 분위기라 아이들이 세월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등 문제가 크다”고 말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로 인한 사회적 피로감이 큰 것은 진상규명 책임 소재 추궁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유가족들에게 화살이 잘못 겨눠지고 있다”며 “놀러 가다 당한 사고를 왜 정부 책임으로 돌리느냐는 식의 악성 댓글 등은 비정상적 행태”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져야 재발방지책이 나올 수 있고, 그 이후 우리 사회도 치유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치유 ‘골든 타임’ 놓쳤으나 관리 필요
사고 후 1년을 트라우마 치유 ‘골든 타임’으로 보는 심리치료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가 치유 시기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선현 대한트라우마협회장(차의과학대 미술치료대학원장)은 “왜곡된 정보를 사실로 믿고 악다구니 한다거나 이제는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는 것 모두 세월호 이후 나타난 사회적 트라우마의 양상”이라며 “1주기를 전후해 유족들은 물론 국민들도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기념일 증후군’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회장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4단계로 분류하고 각 단계별로 치료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단계 군은 세월호 생존자 등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다. 김 회장은 “사고 당시 아이들을 구한 화물차 기사 김동수씨가 내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라며 “세월호 생존자로 1차 피해자인 그조차 제대로 된 심리치료를 못 받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안산 지역에 트라우마 심리지원센터가 운영되고 있지만 김동수씨처럼 타지역에 사는 이들은 치료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2단계 군은 유가족이나 친구 등 참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죄책감과 분노 조절장애 등에 시달려 깊은 우울증에 빠질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김 회장은 “유가족 중 특히 청소년들은 안정을 찾았다가도 관련 뉴스나 인터넷 악플 등을 보고 상처가 재발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인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방대원이나 자원봉사자, 시신 DNA 검사를 진행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 사건 취재기자 등은 3단계 군에 속한다. 이들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심리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실시간으로 뉴스를 시청하며 긴장과 충격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장시간 노출됐던 국민들은 4단계 군에 해당된다. 대부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정을 찾지만 공감능력이 큰 사람이나 부정적 태도를 가진 경우에는 잠재해있던 심리적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도 한다. 김 회장은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회피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합리적 의견을 공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트라우마 극복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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