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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으로 한국 읽기] 주객전도 연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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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덜난 나라 살림이 국민 탓인가. 정부 책임이다. 세대간 갈등 조장은 전가를 위해서다. 재정 나쁘다고 연금을 죽일 순 없다. 주객전도다. 복지비론 한 푼도 아까운 우파의 음모다.
“여야 합의로 마련된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국민연금 강화 방안이 청와대와 정부의 반발에 부닥쳐 표류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급여율(명목 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50%로 상향 조정하는 안이 논란의 불씨다. 소득대체율 인상에 반대하는 쪽의 주장은 한결같다. 지금의 국민연금 가입자가 받는 혜택을 늘리는 대가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떠넘긴다는 것이다. (…) 국민연금은 궁극적으로 미래세대의 노인 부양 부담을 완충해주는 장치이다. 이런 장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커지면 미래세대에게도 결국 재앙이 된다. 국민연금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키우는 단골 논리는 ‘기금(적립금) 고갈론’이다. (…) 국민연금은 국민 누구나 겪게 될 노령화라는 위험을 국가가 해결해주는 제도이다. (…) 가입자에 대한 연금 지급의 책임은 국가 몫이라는 것이다. (…) 국민연금 재정의 안정은 연금제도의 수단일 뿐이다. 최종 목적은 든든한 연금제도를 통한 국민 노후소득의 보장이다. 늙거나 병들어 스스로 먹고살기 힘들면 기본적인 생계를 국가가 보장해주는 제도는, 지금 우리 세대가 미래세대에게 반드시 물려줘야 할 유산이다. 국민연금의 재정 불안을 내세워 미래세대의 부담을 짐짓 걱정하며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위선자들이야말로 미래세대의 적이다.”
-미래세대를 걱정하는 위선자들(한겨레 ‘싱크탱크 시각’ㆍ박순빈 연구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 전문 보기
“보수 진영의 대통령이든 진보 진영의 대통령이든 다를 게 없다. 나라 살림을 책임지다 보면 ‘내 대(代)에서 폭탄 돌리기를 멈추고, 폭탄의 뇌관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의도는 달라졌다. 여야는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마련하면서 돌연 국민연금을 끼워 넣었다. (…) 여당에서 야당이 되자 공무원들의 표 속으로 돌연 숨어버린 야당, 내년 총선과 그 다음 대선을 앞두고 공무원들의 미움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간이 작아진 여당은 시곗바늘만 살짝 늦춰놓고 폭탄 돌리기를 재개할 모양이다. 연금 개혁은 노무현의 업적도, 박근혜의 업적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보수나, 진보의 어젠다도 아니다. 지금, 우리 세대에서 해체해야 그나마 아들딸들에게 돌아갈 피해가 작아지는 폭탄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8년 전 연금 개혁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복기해야 한다.”
-김무성ㆍ문재인, 당신들의 차례요(중앙일보 ‘박승희의 시시각각’ㆍ정치부장) ☞ 전문 보기
“허약한 공적연금 체제를 자양분 삼아, 사적 영역이 퍼뜨리는 노후 공포는 야금야금 사람들을 파고든다. 공적 체제 없이도 충분히 여유있는 소수를 제외하면 그 어느 누구도 돈을 번다고 이 공포를 벗어나긴 쉽지 않다. 자본의 욕망은 언제나 사람들에 몇걸음 앞서간다. 그건 젊은 세대에게든 나이 든 세대에게든 마찬가지다. 세대간 연대란 그런 서로의 처지에 대한 공감을 넓히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백금세대’와 노후공포(한겨레 ‘편집국에서’ㆍ김영희 문화부장) ☞ 전문 보기
“국민을 위한 정부라면 국민연금, 더 주는 게 맞다. 현재 국민연금은 휴지조각 수준이다. 노인빈곤율은 50%에 육박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이 가장 높다. 연금의 명목소득 대체율도 OECD 회원국 평균 57.9%보다 낮은 40% 수준이다. (…) 가입 기간 40년간 월평균 소득이 200만원이면 연금은 40% 소득대체율 기준으로 명목상 80만원이다. 현실은 평균 가입 기간이 20년 내외여서 실질대체율은 명목대체율의 절반이다. 따라서 생애 월평균 소득이 200만원이면 실질대체율은 20%로 줄고 연금은 80만원이 아니라 40만원이다. 이 돈으로는 기초 생계도 어렵다. (…) 재정건전성 강화를 위한 답은 여러 곳에 있다. 연금 피크제 도입이나, 국민연금 연금보험료 및 급여수준 결정의 기초가 되는 소득구간 조정 방식도 있다.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의 짝짓기, 즉 중층연금도 대안이다. 연금 피크제는 (…) 일정 연령에 도달하거나, 부부가 함께 동종의 연금을 받거나, 연금 대신 일을 택할 경우 급여를 줄이는 제도다. (…) 소득구간은 매년 조정이 돼야 하는데 정부는 20년간 방치하다 2009년에야 물가연동을 시작해 2015년 최고소득은 408만원이 됐다. 월소득 408만원은 6분위 수준이다. 정상 조정됐다면 최고소득은 408만원이 아니라 현재 10분위 평균소득 990만원 정도여야 한다. (…) 그래서 대기업 과장부터 회장까지 국민연금 보험료도 같고, 연금 급여도 같다. 이 기형적 소득구간을 조정하면 재정건전성이 높아진다. (…) 노인은 밥만 축내는 계층이 아니다.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비주도층이다. 노인이 구매력을 가져야 소비 주도 역할을 한다. 노인이 연금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모습을 목격해야 청장년층이 지갑을 연다. 연금은 소비가 아니라 투자다.”
-국민연금, 더 주는 게 맞다(5월 9일자 서울신문 ‘열린세상’ ㆍ허만형 중앙대 행정대학원장) ☞ 전문 보기
“공무원 연금과 비슷한 사학연금이나 군인연금을 포함한 ‘3대 연금’혜택을 둘이 함께 누릴 수 있는 부부라면, ‘삼성가(家)’나 ‘현대가’라고 불리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부러움을 독차지한다.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1988년부터 국민연금보험료를 내왔지만, 얼마 전 관리공단이 우편으로 알려준 예상 연금수령액은 월 140만원 남짓이다. (…) 애초에 ‘3대 연금’과 거리가 먼 친구들은 직장에서 ‘잘 나가고 못 나가고’와는 무관하게, 거의 다 비슷하다. (…) 가입기간이 짧았던 선배들은 적게는 월 30만원, 많아야 80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다. ‘용돈 연금’이란 비아냥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 연금보험료 전액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지역가입자와 달리 직장가입자의 눈에는 기여율 인상은 별 부담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월 408만원으로 공무원연금보다 월 350만원 가까이 낮은 ‘소득상한선’을 그대로 두고서는 소득대체율을 끌어올려봐야 헛일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소홀히 하는 여야의 속내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결국 늘어나는 보험료의 절반을 부담해야 할 기업의 처지가 걱정스러워서 아니겠는가.”
-용돈 연금(5월 9일자 한국일보 ‘지평선’ㆍ황영식 논설실장) ☞ 전문 보기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소득대체율 40%를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 40%는 40년 국민연금 납부기간을 기준으로 책정된 것이다. 현행 60세 국민연금을 수급하는 것을 기준으로 20세부터 1년의 실업기간도 없이 60세까지 국민연금을 납부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 전체 국민연금 수급자의 실질소득 대체율은 2014년 18.1%(평균 가입기간 10.1년)에서 점진적으로 증가해 2032년에는 23.4%(평균 가입기간 17.3년)로 최고조에 달하는 정도이다. (…) 둘째,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인상하게 되면 국민연금을 더 많이 내야 하기 때문에 소득대체율 인상에 반대한다는 논리다. (…) 이 부분은 국민연금보험료 인상이 누구에게 부담이 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 직장인의 경우 고용주 50%, 근로자가 50%를 부담하고, 영세자영업자와 근로자수 1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도 국가에서 보험료의 50%를 지원하고 있다. 국민연금보험료 증가에 대해 이렇게 민감한 이유는 근로자의 부담보다는 고용주, 즉 기업 부담에 대한 저항이 내재돼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마지막으로 국민연금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국민연금재정 안정화를 위해 국민연금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국민들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국가안보를 위해 무기를 개발하고,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에 재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령화로 인해 발생하게 될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국가재정을 사용하는 것에는 왜 반대하는 것일까? 과연 국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국민이 세금을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필요하다(경향신문 ‘시론’ㆍ김정근 강남대 실버산업학부 교수) ☞ 전문 보기
문학은 강력하다. 머리를 깨우는 건 정연한 논리지만 마음을 흔드는 건 끈질긴 연상들이다.
“지난달 29일 아베 일본 총리의 미 의회 연설 중에서 하이라이트는 이오지마(硫黃島) 전투 이야기였다. (…) 당시 일본군을 이끌었던 구리바야시 중장은 뛰어난 전술과 지휘력으로 미군을 끝까지 괴롭혔다. (…) 그런데도 이 전투가 아베 연설에서 양국 화해의 계기로 등장한 것은 세계인들이 잘 몰랐던 이 전투가 전쟁을 반성하고 전몰자를 추모하며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상징 같은 사건이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는 내러티브(narrative·실화나 허구의 사건들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구조적 형식)의 힘이 컸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책과 영화로 이 사건을 풀어내는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 과거사에 대해 일본 측에 변할 것을 요구만 한다면 일본은 고사하고 세계 대중의 마음도 움직이기 어려울 수 있다. 인간은 마음이 움직여야 주장도 받아들인다. 마음을 움직이려면 감동할 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도 과거사에 대해 세계인이 공감할 만한 내러티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主張보다 내러티브다(조선일보 ‘데스크에서’ㆍ최원석 국제부 차장) ☞ 전문 보기
“지난 4월13일 세계는 두 사람의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한 사람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다른 한 사람은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이들은 오랫동안 정열적으로 세계의 양심을 대변해온 이른바 ‘좌파 문학의 거장’으로서 세계 전역의 독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는데, 신기하게도 같은 날 타계했다. (…) 지금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예외는 있지만) 여러 모로 세계의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엄청난 혁명적 변화 과정에서 막중한 역할을 해온 것이 시와 문학,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 갈레아노는 원래 저널리즘에서 출발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문학과 정치, 그리고 역사는 별개가 아니었다. (…) 그에게 문학이란 야만적인 지배와 수탈과 폭력 밑에서 짓눌리고 억압돼온 자들이 ‘자유인’으로서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즉 근원적인 의미의 ‘정치적’ 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갈레아노의 스타일은 비인간적인 체제나 기득권 세력의 탐욕과 폭력적 지배를 소리 높여 규탄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문학은 비참한 역사와 현실을 묘사할 때도 늘 풍부한 민중적 감수성에 뿌리를 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되고, 그 이야기들은 예리한 아포리즘, 해학과 위트, 시적 환상과 뒤섞여 있다. (…) 그는 민중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이야기’의 힘 때문이라고 믿었다. (…) 갈레아노는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보는 ‘납처럼’ 무거운 언어를 싫어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뒤늦은 추도사(5월 7일자 ‘김종철의 樹下閑話(수하한화)’ㆍ녹색평론 발행인) ☞ 전문 보기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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