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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으로 한국 읽기] 빈곤 연쇄의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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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도 인력(引力)이 있다. 착취는 끝없다. 피착취자는 몽땅 빼앗긴다. 질투조차 사치다. 만물은 쏠린다. 독점이 자연이다. 가난한 이에게 신은 체념을 줬다. 빈곤 연쇄는 필연이다.
“그의 급여 명세서에는 ‘월급 117만7,460원-(기숙사비 300,000 + 쌀 50,000)= 827,460원’이라 적혀 있었다. 전기ㆍ가스비 별도에 월 2회 휴무. 27일 보도된 한국의 한 농장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다. 뉴스의 요지는 창고 같은 컨테이너의 터무니없는 기숙사비가 임금 착취의 구실이 되고 있어 정부가 기숙사비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로 했다는 거였다. 농장주는 “자꾸 최저임금이 올라가니까. 그렇게 비싸게 주고 (외국인 노동자를) 쓰지를 못하니까”라고 해명했다. (…) 그들이 재배한 ‘7종 신선 쌈채소’의 1kg 인터넷 판매가가 7,000원선이다. 배송도 무료다. 그러니 농장주의 최저임금 타령을 탐욕의 핑계라 치부하기도 힘들다. 그런 채소의 주 소비층은 아마 살기 빠듯한 도시 서민들일 테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나는 저 저임금 사슬의 한 매듭이 된다. (…) 가난은 그렇게 더한 가난 위에서 그들의 과실로 각자의 저임금을 버틴다. 그 사이사이 영세 자본이 있고, 그 위에 큰 자본이 있다. 그러므로 노동력을 지닌 가난은 극복하고 구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욱 굳건해져야 할 경제적 토대다. 그 토대를 역설적으로, 최저임금이 지탱한다. 그런 사회의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란 허구이고 기만이다. (…) 두 딸 키우며 수업 듣고 두 개의 파트타임 일을 하는 가난한 백인 여성인 그는 새벽 3시에 잠들어 6시에 일어나는 일상을 소개한 뒤, 왜 가난한 사람들은 정크푸드를 달고 사는지, 왜 인생 설계를 못 하는지, 왜 그 비싼 담배를 못 끊고, 왜 무책임하게 성(姓)이 다른 아이들을 줄줄이 낳는지…, 등등을 썼다. (…) “나는 잘못된 결정을 많이 합니다. 길게 보면 마찬가지니까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인데 지금 덜 쓰고 아낀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가난은 참 암담한 거여서, 뇌에서 장기계획을 차단해 버립니다.(…) 그 무엇도 희망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것만 생각하죠.””
-가난에 대하여(한국일보 ‘편집국에서’ㆍ최윤필 선임기자) ☞ 전문 보기
“지난봄에는 후쿠시마의 핵 공포 속에서 일상의 삶을 사는 지식인의 글 가운데 ‘인간의 불평등’이란 거창한 말과 만났다. (…) 거기서 문득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미 패배가 정해진 사람들이 있다”란, 차라리 체념적인 구절이 눈에 박혔다. (…) 내가 오늘날의 이 세계가 숨긴 불평등의 구조를 확연하게 배운 것은 우리나라의 두 지리학자 박선미와 김희순의 ‘빈곤의 연대기’에서였다. 두 저자는 ‘불평등의 국제적 구조’라는 신선한 관점으로 현대 세계의 불평등 현상을 분석하고 전부터 내게 회의적으로 보였지만 그 실제를 잘 모르던 ‘신자유주의’ ‘세계화’ ‘다국적기업’이란 21세기의 불순한 추세들이 지닌 문제성과 그 정체를 밝혀주었다. 두 학자의 소개에 의하면 세계사적 ‘대분기’를 이룬 1820년대 선/후진국 간의 평균 소득 격차는 6 대 1이었는데 100년 후 70 대 1로 급격히 벌어졌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인류사에서 가장 낭만적인 시대였던 1960년대’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그 격차는 더욱 커졌다. 불평등 무역 구조의 폭력과, 그 적절성에 대한 고려 없이 선진국형 구조조정을 강요한 아이엠에프 등 국제금융기구의 횡포, 20세기 종반을 휩쓴 국제관계의 변화와 컴퓨터에 의한 금융거래의 초국경적 자유유통 때문이었다. 1990년 미국 노동자의 한시간당 평균임금은 6.98달러지만 나이키 티셔츠를 생산하는 인도네시아 노동자는 하루 동안의 노동의 대가가 1.03달러로 시간 기준으로 55분의 1이었다. (…) 소득 불평등의 이유는 우선 국내적 여러 모순에 그 탓을 돌려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가난하고 무력한 후진국일수록 내부적 실패 이상으로 외부적 원인에 크게 작용받는다는 사실을 ‘빈곤의 연대기’는 거듭 강조하고 있다. (…) 최악의 기아선상에서 출발한 우리가 이제 신자유주의 선진 대열에 끼어들었다며 유신 시절의 우리 정부와 기업들이 자행했던 노동 착취와 불공정 거래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며 더 심한 빈곤의 악순환으로 그들을 몰아가고 있지 않은지, 참으로 두렵고 걱정스럽다.”
-세 도시 이야기(5월 22일자 한겨레 ‘특별기고’ㆍ김병익 문학평론가) ☞ 전문 보기
정년은 불합리하다. 퇴직 조건이 나이일 순 없다. 차이 주체는 개인이고 흔한 게 역전이다. 없애야 옳다. 하지만 위험하다. 고용이 흔들린다. 연대할 때 소장(少長)은 공존할 수 있다.
“내년부터 300인 이상 기업에 60세 정년이 의무화되고, 내후년에는 300인 이하 기업에까지 확대된다. 이 조치로 내년에는 5만명, 내후년에는 28만명 정도 퇴직자가 줄어든다. 신입사원보다 보통 2.5배 정도의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이만큼 더 직장에 남아 있으면 기업이 신입사원을 채용할 수 있는 여지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상황에 이른 청년실업 문제가 우리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 노사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갈등과 모순의 뿌리는 세월이 지나면 임금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그래서 퇴직할 연령이 되었을 즈음에는 자신이 기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아가는 경직적인 호봉제 임금 체계에 있다. 서구 선진국에는 정년(停年)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다. 기본적으로 임금이 성과와 연동돼 있어서 자기가 일한 만큼 임금을 받아가므로 단지 나이가 몇 살이 되었다고 그만두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임금피크제는 성과연봉제의 초보적 형태에 불과하다. 정년이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일할 능력이 있고 회사 입장에서도 더 일하게 하고 싶은 사람까지도 그만두게 만드는 제도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정년까지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로서보다 일률적으로 내보내는 장치로 더 잘 작동하고 있다. 정년 제도를 큰 의미가 없게 만드는 명예퇴직 제도도 마찬가지이다. 임금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도 없고, 월급 값을 못하는 사람만 선별적으로 그만두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일정한 나이가 된 사람을 모두 그만두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직적인 임금 체계와 고용 보호는 월급 값을 못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 값을 하는 사람들까지 억울한 조기 퇴직을 강요당하게 만든다. (…) ‘기여와 보상의 불균형’을 한꺼번에 일소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완화해 가야 한다.”
-임금피크제만으론 안 된다(조선일보 ‘朝鮮칼럼’ㆍ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 전문 보기
“박근혜 정부의 세대간 이간질이 또 시작됐다. 이번에는 일자리를 놓고 장년층과 청년층을 ‘의자놀이’에 몰아넣고 있다. 아버지 세대가 지금 있는 일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아들딸들이 취업의 꿈과 희망을 잃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내년부터 종업원 300명 이상 사업장에 한해 정년연장 의무화를 시행함에 따라 이른바 ‘청년 고용 절벽’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그래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공기업과 대기업의 임금피크제이다. 장년층을 위한 정년연장의 충격이 청년 취업난을 초래하는 만큼 임금피크제로 기업 부담을 덜어주는 대신 청년 고용 확대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 고용은 노동시장에서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에 대한 수요, 즉 일자리의 증감은 기업의 투자와 생산활동의 결과이다. 국민경제 전체로 볼 때는 성장잠재력이 고용의 결정적인 변수다. (…) 장년층의 대규모 은퇴에 따른 노후 불안과 소비 여력의 축소 또한 성장잠재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 엄격히 말하면 정년연장은 청년 고용 촉진과는 별개의 과제이다. 정년연장 의무화 법안의 정식 명칭은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다. 연령에 따른 고용 차별을 금지하자는 게 기본 취지이다. 또 급격한 인구고령화에 따른 산업인력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법 취지를 그대로 살린다면 정년연장을 둘러싸고 노정, 노사 간에 갈등이 벌어질 까닭이 없다. (…) 장년층의 고용 안정과 청년층의 고용 창출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의자놀이’(한겨레 ‘싱크탱크 시각’ㆍ박순빈 연구조정실장 겸 논설위원) ☞ 전문 보기
*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코너 연재를 마칩니다. 그 동안 ‘칼럼으로 한국 읽기’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 ‘칼럼으로 한국 읽기’ 전편(全篇)은 한국일보닷컴 ‘이슈/기획’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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