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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상 '인정하고 대화하라'… 독일 평화 통일의 기반 닦아

입력
2015.08.23 17:11

동독을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공산주의 체제 붕괴 시도 안 해

한반도 통일에 직접적 교훈… "기적 기다리는 건 정치가 아니다"

에곤 바르(1922~2015)
에곤 바르(1922~2015)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동방정책의 입안자이자 유럽 평화의 전략가는 자신의 긴 ‘항해’를 끝냈다. 바다의 물결은 조용했고 항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에곤 바르가 20일 93세로 숨지자 독일의 모든 일간 신문은 1면 중앙을 그의 사진으로 장식해 추도했다. 알려진 대로 그는 1970년대 사민당 출신의 서독 총리이자 유럽 최고의 평화정치가였던 빌리 브란트의 참모이자 친구로서 독일 통일과 유럽평화의 근간을 다졌다.

독일이 자랑하고 유럽이 존경했던 바르의 부고에 독일 곳곳에서 그가 남긴 탈냉전 평화 정치의 의의를 되새기고 있는 지난 며칠,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긴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무엇이 독일과 한반도의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

냉전기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 구조와 국제적 조건의 역사적 차이는 누구에게도 훤하다. 그렇기에 독일의 분단 극복 과정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할 수도 없고 독일을 모범으로 한반도 분단 극복의 지혜를 찾는 것도 한계는 뚜렷하다. 그러나 냉전을 열전으로 해결하려다 자멸로 갈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서독 평화 정치의 함의를 제대로 찾는 일이다.

‘통일’ 독일과 한반도 차이는 ‘행위자’

유럽과 동아시아가 마주한 국제 정치의 구조나 역사적 맥락의 차이를 내세워, 또는 상대하는 대상 즉, 동독과 북한이 드러낸 억압 정치의 질적 성격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독일 평화정치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 적대적 갈등과 전쟁 위기는 삶을 옥죄기에 어떤 곳에서 발생하든 모두 우리의 문제이고, 화해와 평화는 소중하기에 어떤 곳에서 이루어지든 모두 우리의 성취다. 바르가 입안하고 브란트가 구현했던 서독 동방정책의 성과는 대륙 저편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 만성적 적대와 갈등이 삶의 일부가 된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자극이자 보편적인 교훈이다. 그렇기에 독일과 한반도가 현재 직면한 탈냉전과 냉전 지속의 차이는 구조나 조건이 아니라 행위자와 행위들의 역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독일 평화정치를 개시하며 모범을 보인 브란트와 바르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가였다. 둘은 모두 현실적인 사회민주주의자이자 실용적인 평화정치가였다. 그들이 구현한 화해와 조정의 정치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새롭게 등장한, 아니 창조적으로 발명된 신종 정치가 유형이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이론의 정치나 이상주의를 따르는 규범의 정치를 넘어 ‘사람들의 구체적 고통을 해결’하고 ‘지금 당장 해결 가능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으로 인도적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을 브란트와 바르는 ‘작은 걸음의 정책’이라고 불렀다, ‘거창한 얘기를 하는 것 보다는 작은 걸음을 내딛는 것이 더 중요하다’가 사고의 핵심이었다.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들에 매달려 사람들의 고통 경감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과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브란트와 바르가 구상한 평화정치의 근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변하게 하라

1963년 7월 바이에른주의 작은 시골 투칭의 기독교 아카데미에서 바르가 발표한 ‘접근을 통한 변화’는 그 모든 것의 정수이자 출발이었다. 바르는 서독의 기존 동독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구상을 발표했다. 그는 동독 체제의 붕괴를 노린 모든 종류의 압박과 규탄 정책을 거두고 동독을 국가로 인정해야 하며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시도하거나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현상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 아무리 상대 국가와 체제가 비이성적이더라도 일단 그대로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의 상대자로 존중해야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와 그를 보좌해 공보관직을 맡고 있던 바르는 베를린 위기(1958~1963)와 베를린장벽 건설(1961년 8월 13일)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다른 누구보다도 더 공산주의의 위협과 자유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런 그들이 공산주의의 극복은 위협이나 압박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과 대화하고 협력(‘접근’)함으로써 그 체제가 스스로 변하도록(‘변화’) 유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때 바르는 대화를 한다면서 상대 정권의 붕괴를 함께 도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경제적 곤경이 정권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던진 선의의 충고, ‘무역을 중단해라, 그러면 우리는 허리띠를 더 졸라맬 것이다’는 말은 유감스럽게도 어떤 길도 없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우리는 경험을 통해 긴장의 증대가 오히려 울브리히트(당시 동독 공산주의 지배자)의 입지를 강화하고 분단을 더 심화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접근을 통한 변화’ 중에서) 요컨대, 평화는 상대 체제의 직접 붕괴를 노리거나 염두에 두는 모든 전략과 완전한 단절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통일에 대해 긴 안목을 갖기를 요구했다. “이제 분명한 것은, 통일이 하나의 역사적 날에 하나의 역사적 회담에서 하나의 역사적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일회적인 행위가 아니고 많은 중간 단계와 절차들을 가진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동독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함을 부정하지 않았고 자유선거를 통한 통일의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대화와 협상의 과정에서 동독의 자체 변화를 통해 훗날 달성될 과제로 본 것이다.

당당했지만 위압 않는 태도와 언변

생각이 다르니 말이 다르고, 말이 다르니 행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바르는 1970년대 전반 브란트 총리를 보좌하는 비서실장으로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동독과의 협상을 주도했다. 이때 그가 보인 현실정치가로서의 능력은 눈부셨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분야의 협상 과제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식과 정보가 풍부했다. 협상에서 난관이 생길 때마다 그의 창의로운 발상과 작은 (역)제안들이 빛을 발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언어와 태도였다. 그는 당당했지만 위압적이지 않았고 분명하게 얘기하되 자극적인 말을 피했다. 상대의 처지에서 상황을 볼 줄 알았고 그러면서도 과도한 정치적 제스처로 공허한 말들을 남발하지 않았다. 인사이더 권투선수처럼 한발씩 꾸준히 상대에게 다가갔지만 주먹이 아니라 포옹을 날리며 신뢰를 쌓았다. 바르는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말한 것을 지키는 것이 신뢰다”라고 말했다. 일상의 도덕을 정치의 덕목으로 만든 것이다. 사람들의 고통에 집중하고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말과 글은 힘이 있었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바르는 단순히 브란트를 보좌한 인물이 아니었다. 탁월한 언어 감각과 현실 분석력을 지닌 바르는 브란트의 최측근인 동시에 독자적인 전략가로 자주 브란트보다 한발 더 앞서 나갔다. 그럴 때 마다 ‘햄릿’이라 불릴 정도로 신중했던 브란트는 주저하며 숙고한 뒤 결정했고 때로는 바르의 발걸음을 잡아 당겼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이견도 많았다. 그렇지만 바르의 말대로 그들은 “토론하고 토론하고 토론했다”. 바르는 브란트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자질과 능력, 즉 정치지도자로서의 탁월한 매력을 가진 인물로 높이 평가해 항상 브란트의 그늘에 자신을 숨겼다. 브란트의 허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1992년 브란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브란트를 추켜세우고 자신을 낮추었다. 브란트와 바르의 이런 우정은 독일 사민당의 자랑이었고 독일 국민에게는 축복이었다. 북한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정당 내에서조차 우정의 정치를 만나기 어려운 한국을 생각하면 부러울 따름이다.

‘통일 준비’가 아니라 ‘평화 실천’해야

독일 통일 25주년이 다가온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 정부와 여러 기관들은 ‘통일을 준비’한다며 독일 통일의 경험에서 배운다고 바빴다. 대부분 동독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주목하며 흡수 통일의 과정을 ‘흡수’하는 게 목표였다. 한국과 독일의 고위 정치가들과 학자들이 만나는 ‘한독통일자문회의’가 5년째 진행되고 있다. 그 자리에 에곤 바르는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독일 통일의 가장 결정적인 초석을 낳은 평화정치가를 빼고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게다가 북한과의 화해 협력이 중단되자 모두 베를린으로 몰려와 각종 행사를 남발하고 있다. 독일 언론과 여론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일들에 세금을 쏟아 부으며 허황되고 망상적인 통일의 교훈을 찾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을 다녀간 뒤 정부는 ‘통일 대박’이란 말로 자기기만에 빠졌고 ‘통일 준비’라는 구호에 최면 걸려 비실제적이고 반실용적이고 초현실적인 말과 일들로 ‘기적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통일의 길도 아니고 평화의 방식도 아니다. ‘접근을 통한 변화’의 마지막 문장대로 그것은 “정치도 아니다”. ‘통일’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실천’해야 한다.

베를린=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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