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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년 전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은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기가 힘듭니다. 중산층은 무너지고, 서민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특권층의 반칙으로 정의는 땅에 떨어졌고, 무차별적 토건사업으로 환경과 생명은 파괴되었습니다. 재벌 대기업 편중정책으로 사회적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울분과 분노만 충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갈등과 분열, 차별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문명사적 전환의 물결을 타고,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는 그날을 향해, 다 함께 손 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노동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겠습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철저히 지켜 비정규직의 노동여건을 개선하고 획기적인 중소기업 지원 대책을 추진하겠습니다.…공동체의 가치와 진보적 혁신을 담아내는 진보적 성장은 사회 전체의 창의와 혁신에 기초하되, 성장의 과실이 다양한 경제 주체에게 고르게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성장’입니다.” “‘한반도 평화공동체’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목표입니다. 지금 한반도에는 긴장과 불안이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는 한, 우리가 바라는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남북경제협력이야말로 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남북 모두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입니다. 평화는 곧 성장입니다.”
지금도 어김 없이 유효한 이 정책들을 발표한 손학규는 이후 경선에서 패하고 2년 뒤 결국 정계 은퇴까지 하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고, 종국에는 잊혀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손학규가 정계에서 퇴장한 뒤로 더 빛을 발하고, 그의 이름과는 정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회자되는 용어가 있다. 그가 대선 출마 선언문에 포함시켰고 카피로도 활용했던 ‘저녁이 있는 삶’이다.
제도적으로 ‘저녁이 있는 삶’과 동의어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이 말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담은, 사회 여러 분야의 문제를 혁신해가기 위한 움직임과 거의 예외 없이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여성문제, 청년실업문제, 비정규직문제, 노동생산성 문제, 입시교육문제 심지어 창조경제까지. 언제까지 ‘저녁이 있는 삶’을 멋진 구호로만 여겨야 할까. 저녁을 온전한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가 얼마 전 대선 출마 선언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했을 때 대번에 그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 내가 저녁에 때때로 안양천변을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삶을 말하는구나, 이렇게 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 별건가? 단출한 저녁식사 뒤 부부가 손잡고 동네 공원을 거닐거나,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타거나 배드민턴 치는 것, 동네 호프에서 이웃과 가볍게 맥주 한잔 하는 것 등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너무 저녁 없는 삶을 산다. 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하거나, 아니면 일할래야 일할 자리가 없다. 각박한 세상사에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도 많다. 집에서 아이 뒷바라지라도 할라치면 또 힘들다. 아이는 아이대로 저녁까지 힘들고 바쁘다.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는 맞벌이 부부가 저녁에 여유를 부릴 새는 별로 없다. 파트타임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역시 마찬가지다. 저녁도 모두 반납하고 분투하는 삶으로 이만큼 풍요를 이뤘지만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제도와 관행, 문화 등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해결, 사교육 해소, 육아 환경 개선 등 모든 게 맞물려 있다. 질 좋은 일자리를 계속 제공할 수 있는 성장의 문제도 중요하다. 직장문화·가정문화·사교문화 등 사회문화 풍토도 변해야 한다.…저녁이 있는 삶 하면, 손학규 전 대표는 동네에서 막걸리 한잔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문재인 고문은 부인 김정숙씨와 알콩달콩 손잡고 동네 마실 가는 모습이 어울린다. 김두관 경남지사는 동네 이장처럼 이웃 어른들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제격이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저녁 시간 집에서 편안하게 요가를 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모습이 연상된다.”(한겨레신문 2012년 6월 27일자 아침햇발 ‘저녁이 있는 삶’▶전문 보기)
“임기 후반기로 접어든 박근혜 정부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정책 목표는 창조경제와 노동개혁, 그리고 복지일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서로 긴밀하게 연계돼 있는 정책이지만 지금까지의 정책 추진 모습을 보면 이 세 가지 정책이 각각 따로 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의 노동개혁은 큰 틀에서 이 세 가지를 묶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 정책은 역시 창조경제일 것이다. 그 개념의 모호성에 대한 논란이 없진 않지만 원래 ‘창조적’이란 것이 엄밀하게 개념 규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창조경제의 추진 주체와 그 결과에 대한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관료 조직과 대기업에 의해 창조경제가 제대로 주도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금할 수 없다.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기존 조직의 위계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하고, 때로는 상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강한 위계 구조와 상명하복의 질서를 가진 관료 기구나 그런 기업 문화를 가진 우리 대기업 조직이 창조경제를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창조경제의 주체는 거대한 조직보다 혁신과 창의로 무장한 국민 개개인이 돼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편안한 저녁 시간조차 가질 수 없는 빡빡한 생활에 치여 사는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구글이나 애플과 같이 혁신과 창조를 강조하는 미국의 기업들이 직원들에게 시간의 여유와 자유로운 근무를 허용하고 있을 것이다. 노동개혁이 창조경제, 복지와 만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 될 것이다.”(중앙일보 9월 7일자 중앙시평 ‘창조경제와 ‘저녁이 있는 삶’’▶전문 보기)
“미국의 '창조경제'는 정부의 슬로건이 만든 것이 아니라 1950~1960년대 ‘가정’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전후(戰後) 경제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던 미국 중산층 아버지들은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자녀와 시간을 보냈고, 자신의 관심과 자녀의 관심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주파수가 맞지 않아도 존중하며 꿈꾸게 했다.
이런 전통은 몇 번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사회에 이어지고 있다. 회사에서는 ‘스몰 런치(small lunch)’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일하는 대신,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녀들과 ‘빅 디너(big dinner)’를 하며 교감을 나눈다. 따지고 보면,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 할아버지의 재력, 그리고 아버지의 무관심’이라는 대한민국 자녀의 성공 방정식이 얼마나 코미디 같은 현실인가. 자녀 교육은 모두 외주하청으로 돌려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씨앗도 심지 않고 물만 계속 부어대면서 과실을 거두겠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역할은 ‘물려주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다.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창조경제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한민국 아버지들을 제발 저녁에는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자녀들과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게 하든지, 성적 대신 창조를 이야기하게 만들든지, 아니면 자식과 눈이라도 맞추고 서로 웃을 수 있는 기회라도 줘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문패를 ‘창조경제’로 걸고 추진하겠다면, 법으로라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야근과 회식의 명분으로 아버지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기업이나 상사는 ‘저녁이 없는 삶’을 만든 죄목으로 벌금이라도 때렸으면 한다.”(머니투데이 2013년 6월 17일 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 ‘창조경제는 ‘저녁이 있는 삶’에서 시작된다’▶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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