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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색’이지 ‘살색’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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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특정색을 ‘살색’으로 이름 붙인 것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2년 기술표준원에 한국산업규격(KS)을 개정하라며 이런 권고를 했다. 당시 인권위는 “기술표준원이 정한 ‘살색’이란 색깔명은 특정 피부색을 가진 인종에게만 해당되고 황인종이 아닌 인종에 대해 합리적 이유 없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으며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확대할 수 있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기술표준원은 1967년 한국산업규격을 정하면서 일본의 공업규격상 색명을 글자 그대로 번역해 황인종의 피부색과 유사한 특정 색깔을 ‘살색’으로 이름 붙였다. 크레파스를 만드는 업체들은 물론 이를 따라 ‘살구색’ 크레파스를 감싼 겉종이에 ‘살색’이라고 표시해서 팔았다. 그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며 자란 다수의 대한민국 성인들은 인권위의 이 권고가 나올 때까지 ‘살구색’이 ‘살색’이라는 것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한국인이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 같이 살아온 것인지 자신이 딱해지는 경험이었다. 이 색깔명을 만든 ‘원조’ 일본도 다를 바 없다.
친근감의 표시라며 외국인 유학생의 얼굴색을 연탄에 비유한 어떤 정치인이 그래서 부끄럽다. 친해지려고 한 마디 붙였다는 그의 변명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오랫동안 ‘살구색’을 ‘살색’으로 알고 살아왔을 치명적인 무신경의 이 사람이 한 나라의 지도자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마찬가지로 20여 년 동안 난민 신청자 1만 명 중 500여명만 지위를 인정한 나라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노동3권을 보장 받기 위해 10년 동안 싸워야 가까스로 합법 노조를 인정해주는 나라에서 ‘난민=무법자’라는 인상이라도 주려는 것인지 ‘불법 체류자 보호막 된 난민 신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싣는 한국의 언론도 부끄럽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녹취 파일을 들어보면, 나이 몇 살 많으면 아무에게나 말을 낮추고 친근하게 구는 무례한 관행도 거슬리지만, 무엇보다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는 말은 여전히 상대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의 표현일 뿐이다. 사실 상처를 받기로 치면 모욕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문제 발언을 한 해당 정치인이 정치 생명에 상처를 받았어야 마땅하다. 또 그 정도 위치의 정치인이 그런 정도의 큰 문제 발언을 하고서도 같지 않은 사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도 큰 상처를 받았어야 정상일 테지만, 현실은 다른 듯하다.
사실 인종차별주의적 발언이 더 큰 정치 문제로 비화하지 않고 끝나게 된 데는 한국 사회 자체가 가진 문제점 탓이 크다. 우선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인종주의를 아예 한국사회의 문제로조차 생각하지 않는 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이므로 인종문제란 이주민들로 인해 비로소 생겨난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저들에 대한 포용의 문제라는 인식이 여전히 남아서 “우리 안의 인종주의”에 대한 반성을 어렵게 하고 있지만, 실상 한국은 인종주의가 매우 심각한 지역에 속한다.
우선 한국이 단일민족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종주의적이며, 같은 이주민이라고 해도 피부색이나 출신 나라에 따라 달리 대접하면서 턱 없이 우월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열등감을 느끼는 것 자체도 인종주의이다. 혼혈이라는 말로 마치 피가 섞이지 않고 태어나는 인간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 또 피부색뿐 아니라 성별이나 연령, 심지어는 혈액형과 같은 특정한 신체의 지표를 통해 개인을 범주화하고 차별하는 관행 역시 인종주의라고 한다면, 사실 한국이야 말로 인종주의의 영향력이 가장 만연해 있는 나라인 것이다.”(한국일보 12월 21일자 아침을 열며 ‘한국의 인종주의’▶전문 보기)
“김 대표의 ‘어록’을 짚어본다. 분야별로 엄선했다. ①여성 폄훼 “아기 많이 낳는 순서대로 (여성) 비례 공천을 줘야 하지 않나” “대통령 유고 시 여성 총리에게 국방을 맡길 수 있겠나” ②언론관 (전 비서 구속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에게) “너는 뭐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③노동관 (열악한 아르바이트생 처우를 호소하는 청년에게)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 방법이 없다” “쇠파이프 휘두르는 파업만 없었으면 국민소득 3만달러 넘었을 것” ④집회의 자유 “촛불집회, 대통령이 공권력으로 확 제압했어야” “세계가 복면 뒤에 숨은 IS 척결 나선 것처럼 우리도 복면 뒤 숨은 시위대 척결 나서야” ⑤색깔론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90%가 좌파” ⑥지역주의 “전국이 강남만큼 수준 높으면 선거가 필요없다” ⑦외교 결례 “우리는 중국보다 미국이다”….
부지불식간에 속마음을 들켜버리는 실언을 ‘프로이트의 말실수(Freudian slip)’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말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억압된 무의식이 의식에 개입해 남에게 감추고 싶은 생각을 본의 아니게 밖으로 드러나는 일이다.…오랫동안 모셔온 박 대통령에게 충심으로 직언을 해보라. 대통령이 ‘레이저’를 쏘더라도 굴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여보라.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해야 ‘상남자’ 자격이 생긴다. 권력자에겐 쩔쩔매면서, 외국인ㆍ여성ㆍ노동자ㆍ청년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터프한 게 아니라 지질한 거다.”(경향신문 12월 22일자 경향의 눈 ‘왜 김무성에게만 관대한가’▶전문 보기)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정의는 동어반복을 사용한 정의다. 예를 들어 성추행범은 성추행을 한 사람이다. 2011년 부평의 한 초등학교에서 2학년 담임교사가 자신의 반 여자아이들을 껴안고, 엉덩이와 성기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저질렀다. 아이들 전원이 등교를 거부하는 등, 사태가 커지자 해당 교사는 “독서지도를 하는 과정에서 칭찬의 의미로 쓰다듬어 주었다”고 변명했다고 한다. 친근함의 표시로 약간의 스킨십이 있었다는 거다. 동어반복을 사용한 정의는 뒤집어도 똑같이 말이 된다. 성추행을 한 사람은 성추행범이다.
또 다른 예로, 인종차별주의자는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이다. 지난 18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연탄배달 봉사활동을 하던 중, 한 아프리카계 유학생을 향해 “니는 연탄 색깔하고 얼굴 색깔하고 똑같네”라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는 “친근함을 표현한다는 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발언”이었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나이가 더 들었다고 해서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건 괜찮나? 어쨌든 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다. 특히 상대의 피부색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다.”(한겨레신문 12월 23일자 권혁웅의 오목렌즈 ‘친근하지마세요’▶전문 보기)
“얼마 전, 아니 오래 전부터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반말이 도마에 올랐다. 최근에는 김 대표의 비공식 수행비서 출신인 차모씨가 1억5,000만원을 불법 수수했다가 구속된 것과 관련해 기자가 질문을 던지자 “너는 뭐 쓸데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라고 말해 또 구설에 올랐다. 오래 전부터 얼굴을 익힌 기자라 해도 방송카메라를 앞에 두고 친근함을 가장한 반말을 던지는 심리에는 논리나 진실보다는 위압으로 상대방의 질문을 봉쇄하겠다는 무의식이 깔려있는 듯하다. 마치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두 남자가 갖은 논리로 설전을 벌이다가 종국에 빼 드는 비장의 무기가 고작 ‘너 몇 살이야’인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쉬 반말하는 지도자가 지역구를 넘어서 대중과 진정한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을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뒤 내린 조치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선수들끼리 말 놓기다. 이천수가 열 세 살 많은 까마득한 선배인 황선홍에게 “선홍, 이리 패스…’식으로 말하도록 했다. 나이와 학교 선후배로 얽힌 상하관계가 경기장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니 내린 조치였다. 히딩크는 그라운드라는 공식적인 영역에서 말의 평등을 실현하며 경기력을 향상시킨 것이다.
사회 지배층 인사가 공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반말로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여러 사회적 부작용을 만들어낸다면 히딩크식 해법을 사회 전반에 도입해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 “무성, 어제 대통령과 저녁 먹으면서 무슨 말했어?” “대통령 출마 선언서에 쓸데 없는 문구가 담겼는데 누구 의견으로 넣었어?”…아, 살가운 것 같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막 나가는 분위기, 아름답지 못하다. 그냥 함부로 반말하지 말고 서로 존댓말을 쓰자. 반말은 비공식적인 장소에서 폭탄주 터트릴 때나 간혹 아무도 모르게 슬쩍.”(한국일보 11월 10일자 36.5도 “함부로 말 놓지 맙시다”▶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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