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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6년이나 끌어놓고... “심판 대상 아니다”

입력
2015.12.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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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강제징용 피해자 미수금 소송에

“위헌 여부 가려도 재판 영향 없어”

‘1엔당 2000원’ 조항도 합헌 결정

“최장기 미제 사건… 책임 회피한 듯”

헌법재판소가 23일 한일청구권 협정에 대해 제기된 헌법소원을 각하 결정한 직후 피해자 유족들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헌법재판소가 23일 한일청구권 협정에 대해 제기된 헌법소원을 각하 결정한 직후 피해자 유족들이 입을 굳게 다문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홍인기기자 hongik@hankookilbo.com

헌법재판소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재산권을 침해했는지를 가려달라는 헌법소원을 “심판 대상이 아니다”며 각하했다. 최장기 미제 사건으로 6년이나 사건을 쥐고 있던 헌재가 허무한 결론을 내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의 응어리를 풀어 줄 헌법적 해석을 기대했던 법조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헌재는 23일 군무원으로 일본에 강제 징용됐다가 사망한 고 이화섭씨의 딸 윤재씨가 한일청구권협정(2조 1ㆍ3항)에 대해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위헌 여부를 가려도 재판에 미칠 법률적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아니다”며 재판의 전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재판관 9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했다. 이화섭씨 가족이 진행 중인 행정소송에 한일청구권 협정의 위헌 여부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만큼, 이에 대해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각하는 헌법소원 청구가 헌재의 심판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할 때 본안 심리를 하지 않고 내리는 처분이다.

문제가 된 한일청구권협정 2조는 ‘한일 양국은 국민(법인)의 재산, 권리 및 이익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1항)이라고 명시하고, ‘동일 사유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3항)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이 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며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을 줄곧 회피하는 데 근거가 된 조항들이다.

그러나 헌재는 “한일청구권 협정은 이 소송에서 다투는 처분의 근거조항이 아니어서 당해 사건에 적용되는 법률조항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위헌 여부에 따라 재판의 주문이나 이유가 달라지는 경우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씨는 2007년 “아버지가 강제 노역을 하고도 받지 못한 돈을 달라”며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지원위원회(위원회)’에 신청했다. 위원회는 옛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지원법(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희생자지원법) 규정(5조)에 따라 해방 당시 1엔을 2,000원으로 환산해 1,165만 6,000원 지급 결정을 했다. 하지만 이씨는 “그 돈은 현재 가치를 반영하지 못해 정당한 보상이 될 수 없다”며 재심의를 요구했다가 기각 당했다. 이에 행정소송을 벌이던 중 한일청구권 협정과 지원법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했으나 각하되자 헌법소원을 냈다.

청구인 측은 “고정된 환산 보상액만 받게 하고, 한일청구권 협정 때문에 법원에 제소 등 어떤 방법으로든 미수금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못 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헌재는 재판과의 관련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서 대법원은 2012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까지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 강제징용 피해자들 일부는 일본 기업을 상대로 국내에서 소송을 진행했다.

서울변호사회 소속 변환봉 변호사는 “형식적 요건만 본 이번 결정이 이토록 오래 걸릴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라며 “민감한 판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박주민 변호사도 “헌재 스스로 민ㆍ형사 재판처럼 소송 요건을 엄밀히 따지지 않는다고 말해오다가 이번에 유연하지 못하게 그 요건을 판단한 것”이라며 “헌재는 명시된 법률만 보고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게 아니라 사안이 중대한 만큼 헌법적 해석을 풍부하게 해 헌법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강제동원 희생자에 배상액을 1엔당 2,000원으로 못 박은 지원법에 대해선 6(합헌) 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지원금은 인도적 차원의 국가 지원으로, 피해자들이 시혜를 받을 권리가 헌법상 재산권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금액 산정은 입법을 통해 미수금의 가치를 합리적으로 반영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보상이 시작된 해인 1975년까지 일본의 소비자물가상승률과 환율, 우리나라 소비자물가상승률 등을 반영해 합리적인 산법으로 화폐 가치를 반영했다고 판단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반면, 박한철 이정미 김이수 재판관은 “해당 조항은 경제성장률 등을 고려하지 않아 미수금의 현재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위헌’ 의견을 냈다.

일본 언론은 헌재의 각하 결정을 일제히 속보로 전하며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은 “헌재가 위헌여부에 대한 유족 측의 주장을 판단하지 않아 기존 한일협정의 효력을 인정하는 형태가 됐다”며 만일 위헌으로 판단했을 경우 한일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朝日)신문도 “한국에서는 과거 징용자나 유족이 일본기업 3사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13건의 재판이 계류 중”이라며 “이 중 5건에 기업의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3건은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어 이번 헌재 결정이 주목 받고 있었다”고 전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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