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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최종’이고 ‘불가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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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1990년대 초반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자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93년 군의 관여와 사죄의 뜻을 담은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후속 조치로 95년 6월 한국,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의 위안부 피해자 보상을 위한 기금 발족을 공표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이란 약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우호기금’이다.
6월 14일 일본 총리 대변인격인 관방장관이 이 보상 사업의 목적과 방식을 발표하자 그날 바로 한국 외무부는 당국자 논평을 냈다. 당시 이 기금 구상 발표를 보도한 한국일보 기사의 말미에 논평 내용이 한 문장 소개되어 있다. “당사자들의 요구사항이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로 평가한다.” 일본 정부가 올해 낸 고노담화 작성과 아시아여성기금 사업 경위를 담은 조사 보고서에 당시 한국 외무부의 논평 내용이 실려 있다.
“이번 일본 정부의 기금 설립은 일부 사업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이라는 공적인 성격이 가미돼 있고, 또 향후 이 사업이 실시될 때 당사자에 대한 국가로서의 솔직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과거에 대한 진상규명을 진행해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의지가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당사자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된 성의 있는 조치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향후 일본이 기금 설립을 계기로 다양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실(史實)을 명확히 하고 그 해결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감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을 토대로 한 근린 각국과의 미래지향적인 선린우호관계를 발전시켜가기를 기대한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보상금 등을 지급하고 오래 전에 사업을 종료했다. 하지만 한국은 사실상 사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한국에서는 파악된 피해자의 약 4분의 1 정도만이 보상금을 받고 나머지는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기금을 환영했던 한국 정부도 기금 사업에 점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위안부 단체와 할머니들, 한국 언론 등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반발한 가장 큰 이유는 보상금이 일본 정부의 법적인 배상이 아닌 민간단체의 위로금 성격이라는 점이었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거기에 기초한 정당한 배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한일 위안부 협상은 양국 합의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일본 일방의 조치였던 아시아여성기금 때와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이후의 사태는 기시감이 들기에 충분하다. 사실 아시아여성기금 때도 일본 정부의 예산이 한 푼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기금 운영을 위해 일본 정부의 예산이 투입되었고, 보상금 지급 이후 진행된 의료ㆍ복지사업은 일본 정부 예산을 이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법적인 배상을 결단코 거부했다. 이번에도 그런 것처럼 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적인 ‘사업’인 것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관련 단체의 대응도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당시 기금 설립 환영 논평을 낼 때나 이번 협상에 임할 때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도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둘러싼 한일간 또는 한국 내 의견 차이의 구도는 이전에도 뚜렷했지만 이번 협상 이후 한층 더 분명해졌다. 나눔의 집, 정대협 등으로 대표되는 단체는 돈의 액수와 무관하게 일본 정부의 법적인 배상을 원하는 것이고, 법적인 배상은 결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변함 없는(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고집이다. 이번 합의에서 한국 언론에서조차 일본의 태도 변화를 부각해서 말하는 것은 그냥 상황을 좋게 보고 싶은 것일 따름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그 사이를 어떻게 봉합할까를 고민한다.
서로 생각이 분명하기 때문에 풀어가는 방법이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문제는 그 방법이 위안부 단체의 요구를 좀더 반영하는 것인지, 배상을 거부한다는 일본의 고집을 지켜주는 것인지에 따라 방향이 다를 뿐이고, 두 가지 방향이 좀처럼 절충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대의명분을 따질 경우 전자가 훨씬 나은 방법이다. 다만 그 대의에 따라 일본이 변할 것이라거나 실질적인 배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주체가 되어 반복하고 있는 후자의 경우 지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정작 피해자들의 마음을 사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아시아여성기금 때처럼 이번에도 재단이 출범해 보상금일지 위로금일지를 지급하면 일부 피해자는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피해자 할머니 일부는 거부를 공언했고 그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이래서는 해결이라고 할 수 없다.
이번 합의를 보면서 한국 정부는 지난 아시아여성기금 때의 경험에서 배운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배상이 아니라면 당장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데 피해자들에게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작업을 왜 하지 않은 것일까. 도대체 어느 영역까지 적용해야 하는지도 모호하고,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말은 왜 붙인 걸까. 이번 협상은 연내 타결을 위해 쫓겨서 내놓은 결과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를 해를 넘기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고서는 정작 피해자들과 이렇게 소통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타결’을 발표할 수는 없다.
한국 정부가, 특히 이 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위안부 문제는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일본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기 최면에 걸린 듯 하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일본과 다른 여러 분야에서 협력은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숱하게 많은 한일 현안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이 문제 해결에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될 것이고, 정부간 타결에 급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그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결과, 피해자 관련 단체들이 바라는 대로 법적인 배상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론에 정부가 도달한다면 그래도 좋은 것 아닐까. 그 편이 훨씬 납득할 수 있고 당당하다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까. 도대체 무엇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가.
“개인청구권을 ‘숲으로 도망친 개’ 취급하면서 숲 전체를 불사르는데 동의했던 한국 정부는 이번 위안부 협상에서도 숲을 불살라버리자는 일본에 말려든 듯하다. 이런저런 일본측의 ‘성의’ 표현 나열 뒤에 이번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대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논란이 일자 어느 정부 당국자는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우리측이 제안한 것으로, 일본이 뒷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고 한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지 감언이설의 수준이 지나치다. 청구권협정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이라는 대목 때문에 청구권자인 한국이 오히려 정치적, 법적으로 ‘을’이 돼버렸듯이, 이번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는 앞으로 한국 정부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 것이다. 혹여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거론하면 일본은 이미 끝난 이야기인데 무슨 소리냐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할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갑을이 뒤바뀌는 형국이 연출될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 위안부 합의를 통해 한국 정부가 그 동안 표방해온 신념과 원칙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이다. 이번 합의 어느 곳에도 청구권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기본 입장은 이것이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와 함께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이번에 이런 원칙이 무너졌다. 한국 정부는 청구권협정의 예외로 위안부 문제를 풀어내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스스로 어긴 것이다. 일본측은 이번에 정부 예산으로 내놓겠는다는 10억엔이 ‘배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10억엔의 정체는 무엇인가. 50년 전 한국 정부가 대일 ‘청구권’으로 받았다는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에 대해 일본측은 경제협력자금 혹은 독립축하금이라고 말했다. 10억엔도 이와 비슷한 ‘성의’의 표현이지 법적 관계가 분명해지는 청구권 자금은 아닌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청구권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한국 정부는 50년 전처럼 사실상 피해자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피해 당사자가 포기하지 않은 개인청구권을 한국 정부가 포기할 수 있는가.
돌이켜보건대 박근혜 대통령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2013년 3ㆍ1절 기념사)이라는 초강경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이후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의 모든 것이 돼버렸다.…한일관계를 과거처럼 어떤 ‘특수한 관계’로 만들어보겠다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관계 정상화라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일 수 있다. 진정한 한일관계 정상화란 일반적인 국가 관계가 그렇듯이 갈등하면서 경쟁하고 협력도 하는, 그리고 원칙을 세워 따질 것은 따지는 관계이지 않을까.”(한국일보 12월 31일자 아침을 열며 ‘왜 또다시 숲을 불살라버렸나’▶전문 보기)
“아베 정권은 2015년 내내 자신의 원칙과 역사관을 바꾼 적이 없다. 한·일관계의 진정한 현실은 이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 정부가 예산 10억엔을 지출해 재단을 설립하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겠다며 합의했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판단의 대상은 10억엔의 재단인 것이다. 합의문 어디를 보아도 다른 해석을 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기시다 외무상이 합의 직후 일본 기자들에게 “일본이 잃은 건 10억엔뿐”이라고 말한 것은 말실수가 아니다. 이번 합의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했고 총리가 ‘사죄’했음을 평가하는 태도는 립서비스에 취한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은 처신이다.
아베 정권은 12·28 합의에서도 자신의 원칙을 고수했고, 역사관을 바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익이 반발하고 있다고 한국 언론에서도 보도하고 있지만, 아베 정권은 최대 우익 조직인 일본회의를 통해 얼마든지 관리할 수 있는 장악력이 있다.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큰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 책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됨에 따라, 자신이 밀어붙이고 있는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대중국 견제 전략에도 힘을 실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의도치 않게 역사수정주의를 강화하는 아베 정권의 원군(援軍)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역사갈등을 축으로 긴장을 확대시키는 데 동조하는 꼴이 되었다.
반면에 합의문대로라면 12·28 합의를 통해 한국 정부가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미래를 구상했는지 모르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그것에만 한정할 수 없는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한·일 간에 제기된 여러 역사문제들과 깊은 연관이 있는 핵심 사안이다. 탈식민을 통해 동아시아 다자외교의 틀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논점이다. 오늘날의 여성 인권과 일반적인 인권보호 문제로까지도 확장성을 갖고 있는 보편적 주제이다. 하지만 12·28 합의는 현재를 논의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동력을 결정적으로 꺾어버렸다.”(경향신문 12월 31일자 시론 ‘이러려고 ‘타협’했는가’▶전문 보기)
“한일관계의 물꼬를 틀 이러한 전향성에도 불구하고 사죄와 반성, 책임이라는 말 속에서 아베 정권의 진실하고 진지한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바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국제사회에서의 상호 비난과 비판을 자제한다’는 지저분한 토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문명사회에서 협상과 합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게 기본이다. 합의 내용을 행동으로 충실히 이어간다는 의지만 피력하면 그만이다.
총구를 서로 겨누고, 상대를 위협하는 적성국가가 아닌데도 저런 토를 왜 달았을까. 근래 보기 드물었던 아베 정권의 역사적 전향성이 보편적 인권 문제에 대한 진지한 해결자세로 해석되기보다 결국은 국제사회의 지도국으로 가는데 껄끄러운 걸림돌을 제거한다는 동기에서 비롯됐다는 의심이 드는 까닭이다. 소녀상 이전을 요구한 것 자체도 바로 합의의 진짜 동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둔다고 해서 과거사가 지워지는 게 아니다. 설사 우리 정부나 민간의 요구가 없더라도 가해자로서 사죄의 염(念)이 있다면 독일이 그러했듯이 필요할 때마다 하면 된다. 그게 위안부 문제에 임하는 진실한 자세다. 지금의 불가역한 합의가 보여주는 바는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예고하기보다는 신뢰하지 못하는 한일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유리그릇과 다를 게 없다.”(한국일보 12월 30일자 편집국에서 ‘불가역, 신뢰제로의 한일관계’▶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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