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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치기가 제일 쉬웠어요…남자들이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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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앞둔 토요일 오전 10시 반, 서울 서대문 영천시장. 40대 초·중·후반의 세 남자가 장을 보기 위해 모였다. 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일보 문화부의 김범수 부장, 라제기 엔터테인먼트 팀장, 양승준 대중음악 담당 기자. 차례상에 올릴 전 부치기를 장보기부터 설거지까지 몸소 해보는 것이 이들의 오늘 미션이다.
‘사건’은 며칠 전 설 특집 섹션의 프론트 기사 아이템을 논의하던 중 발생했다. 떡국 맛있게 끓이는 법, 색다른 전 부치기, 남은 전 처리법, 한복 멋있게 입기… 민족 고유의 대명절을 앞두고 으레 나오곤 하던 기사들은 어떤 아이템이 결정되든 자연스럽게 여기자 몫이었다. 돌연한 문제제기가 나왔고, 농담처럼 ‘남기자들의 전 부치기’가 아이디어로 제시됐다. 세 남자의 얼굴에 스치는 가벼운 경악의 기미. 여기자들은 이때다 싶어 밀어붙였다. “부쳐라! 부쳐라!” 마침내 김 부장이 결단을 내렸다. “그까이 거, 한다, 해!” 여기자들이 ‘와!’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해본 적은 있는 걸까? 김 부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없지요.” 다른 두 남자도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까이 거, 내가 부친다”
메뉴는 동그랑땡과 산적, 동태전 세 가지로 결정됐다. ‘남성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거칠지만 건강한 전’이 오늘의 콘셉트다. 전이란 게 지역마다, 집안마다 만드는 법이 정해져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하면 뭔가 색다른 게 있어야지, 여자들 하던 방식대로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다부진 포부와 함께 장보기가 시작됐다. 그래도 참고 레시피는 필요했는지, 요리책 한 권이 대동됐다. 표지도, 서체도, 고색창연한 ‘이종님의 오늘의 싱싱메뉴’. 무려 1999년도에 나온 책이다.
장보기는 10분 만에 끝났다. 뭔가 이상했다. “장보기가 뭐가 어렵나. 10분이면 충분하지.” 이들의 호언장담은 그러나 집에 도착해 본격 작업에 착수하자 이내 실책으로 드러났다. “계란, 부침가루, 꽂이도 필요하네?” 다시 슈퍼마켓으로.
막간을 이용해 결혼 19년차인 김 부장과 17년차인 라 팀장, 미혼인 양 기자의 요리 수준을 먼저 점검해보자. 김 부장은 “밥도 설거지도 내가 다 한다”는 본인의 진술과 가족들의 진술이 상당히 엇갈렸다. 라 팀장은 주말마다 “각종 파스타와 에그햄버그스테이크를 휘리릭 만들어 가족들을 환호케 하는” 자타공인 요리의 달인. 양 기자는 평생 계란부침 몇 번 해본 게 전부인, 요리와는 일평생 평행선의 삶을 살아온 총각이다.
수준차는 적나라했다. 동그랑땡에 들어갈 당근 껍질을 깎기 위해 ‘필러’를 건네 받은 양기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의 표정으로 칼날 반대편으로 당근을 찍어댔다. 보다 못한 김 부장이 당근을 빼앗아 깔끔하게 손질했다. 동그랑땡은 ‘나는 지금 고기를 먹고 있다’는 충일한 자의식을 만끽할 수 있도록 단백질을 제외한 다른 재료들은 가급적 넣지 않았다. 요리책 레시피보다 돼지고기의 비율을 파격적으로 높여 다진 당근, 생강, 두부, 후추, 소금만 약간 가미했다. 계란옷도 입히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동그랑땡.”
산적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헬씨(반드시 번데기발음으로) 콘셉트’다. 동그랑땡에서 단백질을 만끽했으므로 채소의 향연으로. 꽈리고추, 느타리버섯, 마늘종, 헹군 김치에다 게맛살로 구성했다. 게맛살은 단백질이 너무 없어 허전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 고기 대신 넣었다. 재료들의 굵기와 넓이가 동일해 나란히 꽂았을 때 정사각형의 모양이 구현돼야 하지만, 남성적 스타일의 산적은 몹시 자유로웠다. 형식에 함몰되다 보면 명절의 흥겨움이 노동의 고통으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밀가루를 묻힌 후 계란옷을 입혀 부치기만 하면 되는 동태전은 간단한 만큼 전통을 존중했다. 다만 계란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분란’이 있었다. 물컹한 계란 알끈을 제거하고 계란물을 풀어야 한다는 라 팀장의 지적에 양 기자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이의를 제기한 것. “알끈을 제거하지 않으면 계란이 잘 풀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계란옷이 지저분해진다”며 라 팀장은 풀어진 계란물 속에서 일일이 알끈을 건져 올렸다.
탔다, 찢어졌다, 그래도 맛있었다
남성적 풍미가 강하게 풍기는 거친 전 부치기가 시작됐다. 라 팀장이 동그랑땡 반죽을 동글동글 빚은 후 납작하게 눌러 프라이팬에 올려주면 양 기자가 지글지글 기름 위에서 반죽을 익혀냈다. 그래도 이름이 동그랑땡인데, 어찌 그리 동그란 모양이 하나도 없을까? 하지만 모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마구 타고 있었다. “불 줄여! 더 줄여!”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갔다. “이거 왜 이렇게 어려워요?” 양 기자의 한탄이 이어졌다. “어휴, 전이 이렇게 힘든 음식이었어요?”
라 팀장이 뒤지개를 빼앗아 동태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동태전은 노릇노릇하게 구우면서도 연노랑의 색감을 잃지 않는 것이 포인트인 만큼 각별히 신경 쓰며 부쳤다. 약불에 올려놓고 인내심에 또 인내심을 발휘하며 부치는 라 팀장에게 양 기자는 계속 “안 뒤집어요?” 물었다. 자꾸 뒤집으면 동태가 부서지며 계란옷이 찢어진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아내들은 약불 앞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삐뚤빼뚤 투박한 산적이 제법 접시 위에 쌓이자 시식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게 뭐지? 산적 곳곳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계란물이 제대로 씌워지지 않은 탓이다. “먹어도 안 죽는다”는 항변 속에 수시로 밀가루를 털며 맛을 본 산적은, 으음, 의외로 훌륭한데? 꽈리고추의 매운 맛과 마늘종의 알싸한 맛이 기름전 특유의 눅눅하고 느끼한 맛을 일거에 날려버리며 산뜻한 풍미를 자아냈다. 내친 김에 동그랑땡도 맛을 봤다. 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맛은 뭘까? 모두의 입에서 “햄버거 패티”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랬다. 그것은 롯데리아와 맥도날드에서 수도 없이 먹었던 햄버거 패티였다. 캐첩을 찍어 먹으면 딱 좋을, ‘나는 고기로소이다’를 온 몸으로 웅변하는 패티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당당했다. “조상님도 똑같은 음식만 드시기보단 색다른 음식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어머니가 불편해 하시지만…”
요리의 달인부터 천하의 초보까지, 세 남자 모두 전 부치기 경험이 없는 이유는 동일했다. “어머니가 불편해 하시기 때문”이다. 결혼 초 아내를 돕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다가 어머니로부터 “여기 여자가 몇이고!” 소리를 듣고 겸연쩍게 되돌아 나온 이후 전 부치기는 남의 일이 되었다. 합법적 면제를 받게 해준 어머니의 그 말이 난처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솔직히 반가웠다는 사람도 있다.
명절증후군을 그저 하루 이틀간의 고된 육체노동으로만 이해한다면 여자들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협량한 존재가 된다. 하지만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본업으로 인식되는 육아와 가사, 가정에서의 여성 착취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제의와 그에 대한 총체적 거부반응이 명절증후군이다. 김 부장은 내내 힘들다며 고충을 토로한 양 기자와 달리 “해보니 어려울 것도 없네”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가 “그게 어려운 노동이라 그 동안 안 한 건 아니지 않느냐. 잘못된 메시지를 주지 말라”는 아내의 비판에 직면했다. 문제의 핵심은 노동의 힘듦이 아니라 노동의 합목적성. “왜 여자만 이 일을 해야 하는가”하는 근원적 회의가 해소되지 않기에 명절 노동이 힘든 것이다. 김 부장은 “그래서 남자들이 계속해야 된다는 메시지”라고 항변했다.
거칠지만 맛있는 전, 아내와 남편들이 한데 모여 옹기종기 부치는 다정한 전. 조상님이 보시기에 이보다 가슴 뿌듯한 풍경이 있을까. “어머니가 불편해 하시니까”에서 “어머니가 불편해 하시지만”으로 올 설에는 한번 바꿔보면 어떨까. 이날의 체험으로 세 남자의 심경에 ‘앞으로는 아내와 함께 전을 부치겠다’는 결심이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올 설에는 전 부치기를 할까 말까, 그 고민 정도는 하게 됐을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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