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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 그날, 무참히 짓밟힌 '백의의 천사' 꿈

입력
2016.04.0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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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알바 퇴근 중 실종 변사체로

비명소리 증언에 납치 차량도 목격돼

2015명 DNA대조했지만 6년간 못 잡아

성범죄 초범의 우발 범죄 가능성도

“사건 현장 증거는 ‘그놈’ 유전자정보(DNA)뿐. 5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DNA가 일치하는 그놈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현장에서 목격됐던 검은색 차량은 어디로 갔을까. 170㎝ 초반 키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현장 주변을 배회하던 남성의 정체는 뭘까.”

2013년 2월 전남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발령 이후 벌써 3년. 그놈을 잡기 위해 내 스스로 수백 번 이상 되뇌었던 범행 관련 정보다. 2010년 목포를 떠들썩하게 했던 ‘간호학과 여대생 살인사건’ 파일은 미제사건팀에서 내가 가장 먼저 뒤적였던 자료다. 사건 발생 당시 전남 목포경찰서 강력계에 근무 중이었던 나는 광범위한 수사에도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 이 사건에 시선이 꽂혔다. 형사의 직감상 범인은 벌써 잡혔어야 했다. 하지만 지독하게 운 좋은 그놈 때문에 나를 비롯한 동료 형사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내가 이 사건을 꼭 해결해야 하는 이유다.

수 없이 찾았던 현장, 그놈은 어디에

대형 한방병원 인근에 허름한 주택들이 늘어선 전남 목포시 용해동 이면 도로. 다시 이 사건을 손에 잡고 수도 없이 걷고 또 걷던 길이다. 2010년 10월 15일 밤 11시 11분. 조수경(가명)양은 이 곳으로부터 1㎞ 떨어진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11시 18분쯤 언니에게 ‘귀가하고 있다’는 문자를 남긴 수경이는 교회 오빠, 친구와 통화를 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헤어진 남자친구 결혼식 소식 때문에 울면서 걷고 있던 수경양이 50대 부부에게 마지막 목격된 시간이 11시 28분. 그로부터 정확하게 2분 뒤인 11시 30분, 사고 현장에서 30m 떨어진 단독주택에 살던 한 주민은 갑자기 ‘악’하는 여성의 외마디 비명소리를 들었다. 같은 시간 현장에서 300m 떨어진 곳에서도 외마디 비명을 들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로부터 5분 뒤 사건 현장에 있던 검은색 승용차 뒷문에 사람 다리가 끌려 들어가는 모습까지 목격됐다.

아무리 늦어도 20분이면 도착했어야 할 동생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언니와 남동생은 16일 0시가 넘어 112에 미귀가 신고를 했다. 동네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어디서도 수경이는 보이지 않았다. 16일 오전 4시 30분. 도로에서 살짝 벗어난 사건 현장 근처 배수로에서 수경이는 옷이 벗겨지고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수사 착수 나흘 뒤. 수경이 시신 발견 장소에서 약 2.5㎞ 떨어진 갓바위 목포해양유물전시관 인근 바닷가에서 수경이 핸드백이 발견됐다. 그 안에는 수경이 휴대폰과 지갑, 바지, 속옷까지 함께 들어 있었다. 잡아야 한다는 형사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범행 차량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놈은 범행에 승용차를 이용했다. 수경이를 차로 끌고 가 성폭행하려다 목 졸라 죽이고 배수로에 버려둔 채 달아나 바닷가에 유류품까지 버린 것으로 추정됐다. 수경이 비명 소리가 들렸다는 곳 근처에서 검은색 승용차를 봤다는 주민과 택시기사들의 증언이 나왔다. 최면수사까지 했다. 이들의 증언 중 공통점은 차량 조수석과 범퍼 사이가 찌그러져 있었다는 것. 하지만 차종은 증언마다 달랐다. 누구는 크레도스라고 했고, 누구는 쏘나타2라 했다.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야 했다. 목포 주변에서 유사한 차량 흔적들을 찾아 다녔다. 사건 발생과 시신 발견 지점, 그리고 유류품이 발견된 전시관까지 그 놈이 갈만한 동선에 있는 모든 폐쇄회로(CC)TV를 확인했다. 헬기까지 동원했다. 유사 차량 3,963대와 차주를 일일이 조사했다. 하지만 그놈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 차량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차량 조사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전시관 건물 꼭대기에 설치된 2대의 CCTV였다. 건너편 야산이 아니라 각도를 아래로 낮춰 도로나 주차장을 향했다면 그놈 차량이 찍혔을 텐데. 너무 큰 아쉬움에 이 곳을 올 때마다 내 시선은 건물 꼭대기에 머무른다.

유력 용의자는 초범? 선원?

수경이 시신에선 용의자의 DNA도 검출됐다. 우선 목포 일대 성폭행 전과자 등 200여명의 우범자들을 대상으로 일일이 조사에 들어갔다. 5년 6개월 동안 진행한 참고인 조사 대상자만 6,000여명. ‘목포 시민들이 모두 범죄자 취급 받는다’는 지역 사회의 반발 여론도 있었다. 불쾌해 하는 시민들을 설득해 가며 DNA 대조를 위해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한 사람만 2,015명에 달한다. 하지만 범인의 흔적은 없었다.

시신과 유류품이 버려진 현장 등을 보면 그놈은 치밀하지 못하다. 프로파일러의 분석도 그랬다. 희생자 신원을 알 수 있는 신분증도 따로 숨기지 않고 그대로 버렸다. 강간범의 경우 재범률이 높은데도 6년 가깝게 DNA 일치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동종 전과자가 아닌 초범의 우발적 범죄 가능성도 거론됐다. 범행 시 장갑을 끼지 않았고, 무차별 얼굴 폭행 등을 한 것을 볼 때 계획범죄가 아니라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DNA 자료가 없는 성범죄 초범이거나 미성년자일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범행 현장 주변에는 학교도 있었다. 비행 청소년 위주로 탐문조사를 벌였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는 못했다. 목포는 항구다. 그놈이 지역 연고가 없다면 항구에 들락거리는 선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 발생 전후로 한 달간 목포를 입ㆍ출항한 선원 명단을 해경으로부터 넘겨 받아 일일이 대조 작업을 벌였지만 이 역시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당시 조사했던 지역 우범자 중 소재를 확인하지 못해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10여명의 행방도 아직 뒤쫓고 있다. 그리고 사건 당일 현장 근처에서 1시간 전에 목격된 30대 초반 남성의 정체 확인도 내가 풀어야 할 숙제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검은색 트레이닝복과 모자를 쓰고 있었고, 170㎝ 정도 키에 마르고 광대뼈가 나왔으며 눈이 다소 옆으로 찢어졌었다는 그 남자. 지금도 나는 그 자의 행방을 쫓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또 비슷한 수법의 전과자가 새로 잡히고 경찰 범죄데이터 상에 올라오면 인상착의를 살피고 DNA 대조는 물론 2010년 수경양 사건 발생 당시 행적까지 조사한다. 사건을 해결할 한 가닥의 끈이라도 잡기 위해 오늘도 전국에서 발생하는 강간과 살인 사건에 내 촉은 쏠려있다.

채 피지 못한 백의천사의 꿈

가족들을 만났다. 수경이와 마지막 문자를 주고 받은 뒤 불안한 마음에 신고했던 수경이 언니는 동생 얘기를 꺼내면서 또 다시 눈물을 훔쳤다. 사건으로 희생되기 전 수경이는 지방대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 간호사 면접시험에 합격한 상태였다. 사건 발생 100일 뒤 있을 국가고시만 통과하면 됐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어디선가 백의의 천사가 돼 웃고 있어야 할 수경이. 동생의 꿈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언니는 말했다. 가난했지만 형제간 정이 유독 돈독했던 3남매라고. 유달리 애교 많고 열정이 많았던 둘째 수경이가 희생되면서 가족들은 모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사건 발생 한 달 후 가족들은 25년 넘게 살던 동네를 도망치듯 떠났다고 한다.

수경이 유해는 목포 유달공원 납골당에 안치돼 있다. 어디선가 태연히 돌아다닐 그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형사의 자존심, 그리고 항상 운명처럼 맞닥뜨려야 하는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 이게 내 운명이다. 잊어도 될 범죄는 없다. 수경이를 죽인 그놈을 찾아 미제사건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목포=김성환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이 기사는 전남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 남설민 형사 시점에서 재구성했습니다. 사건 관련 제보 연락처는 전남경찰청 장기미제사건팀(061-289-2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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