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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부분 절단된 시신, 범인의 지문ㆍDNA 등 없어 ‘백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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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학자도 경악한 살인 사건
“시신 수백 구를 부검해 왔지만
이리 처참한 사체는 처음봤다”
오른손 손가락도 모두 절단돼
증거도 제보도 없어 미궁에
유기 현장에 CCTV 설치 안 돼
빗물ㆍ더위에 부패한 시신 뿐
쇠톱으로 사체 절단 추정만
유력한 용의자는 남편?
평소 자주 다퉈 용의선상에 올라
세면기 등 정밀감식에도 증거 없어
주변 인물들도 알리바이 완벽해
“병리과장님, 여기 좀 보시죠.”
2008년 7월 8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도로변. 토막난 시신 중 일부가 발견됐으니 부검을 맡아달라는 포항북부경찰서 강력계 형사 연락에 포항의 한 병원에 근무하는 김주현(가명) 과장은 이곳까지 온 참이었다. 갈대숲 사이에 널브러져 있는 포대와 비닐봉지에 담긴 사람의 양 팔과 다리는 이미 심하게 부패된 상태. 장마철을 지나며 수일 간 비와 폭염에 노출돼 빨리 상한 듯 했고, 짐승들에게 물려 훼손된 흔적도 선명했다. 2주가 지난 7월 22일 팔다리가 처음 발견된 곳으로부터 1.2㎞ 떨어진 도로변에서 수습한 몸통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 과장은 15일 “법의학자로 10년 가까이 활동하며 시신 수백구를 부검해 왔지만 이리 처참한 사체는 처음 봤다”고 토로했다.
신원 숨기려 사체 오른쪽 손가락 모두 절단
8년 전 여름. 흥해읍에 사는 70대 노부부가 살구를 따러 갈대숲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시신은 더 늦게 발견돼 신원 확인조차 어려웠을지 모른다. 다행히 왼쪽 손가락 지문 일부와 대퇴골 부위로 간신히 신원을 확인했다. 피해자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에 사는 여성 이연주(당시 49세ㆍ가명)씨였다.
이씨의 사인은 설골 골절로 추정됐다. 설골은 턱 아래쪽 목을 감싸는 알파벳 유(U)자형 뼈. 손이나 줄 등으로 목을 졸랐을 때 주로 부러지는 부위다. 알몸 상태이긴 했으나 피부나 장기에 특별한 상흔이 없어 성폭행 사건처럼 보이진 않았다. 범인은 시신 훼손에 날카로운 쇠톱을 사용했다. 단단한 뼈를 한 번에 자르지 못해 톱질을 멈췄다 다시 시작하길 수 차례 반복한 거친 흔적이 역력했다. 경찰은 “범인이 이씨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쉽게 옮기기 위해 절단한 것으로 보였다”고 전했다.
범인은 또 다급한 마음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피해자의 신원이 파악되면 자신의 존재가 금방 드러날까 걱정했는지 지문이 있는 오른쪽 다섯 개 손가락을 모두 절단했다. 휴대폰이나 소지품 옷가지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에 비해 사체의 왼쪽 손가락은 멀쩡했다.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어 다른 사체를 마저 훼손하지 못한 범인의 허둥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 통화 후 자택 인근서 사라진 피해자
담당 형사들에 따르면 이씨 실종 신고는 연락이 끊기고 열이틀이 흐른 6월 24일에야 접수됐다. 신고자는 이씨와 10여년 간 함께 살았던 남편 박철호(당시 42세ㆍ가명)씨. 이씨의 마지막 모습을 본 이도 그였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2008년 6월 11일 아내와 낮술을 마신 뒤 잠들었다고 진술했다. 다음날인 12일 새벽 4시쯤 방금 집에 들어온 듯한 아내를 잠결에 봤고,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는 이미 집을 떠나고 없었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까지도 연락이 없자 박씨는 13일부터 이씨를 찾기 위해 가족, 지인 등에게 연락하기 시작했고, 24일이 돼서야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경찰 수사 결과 이씨는 6월 11일 저녁 택시를 타고 인근 노래방에 들른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휴대폰 기지국에 찍힌 이씨의 마지막 위치는 동해면 자택 인근. 12일 새벽 2시30분이었다. 이씨는 이 시간 집 앞에서 친구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 그는 “사는 게 힘들다, 술 한 잔 마시러 나가려 한다”고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형사들은 통화를 끝낸 이씨가 실제 이 시간쯤 집에 돌아왔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전후해 이씨의 행적은 묘연하다. 휴대폰은 친구와의 마지막 통화 이후 통신 흔적이 없었다. 이씨 집 인근과 시신 유기 현장에 방범용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아 영상 증거도 부족했고, 유기된 시신마저 발견 당시엔 빗물과 더위에 부패돼 범인의 DNA 검출이 안 됐다. 빗물에 모두 씻겼거나 범인이 장갑 등을 철저히 준비했는지 사체를 포장했던 비닐봉지와 포대, 청테이프에도 지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CCTV 없고 DNA 빗물에 씻겨 사건은 미궁 속
사체가 발견된 흥해읍은 이씨 집에서 차량으로 28.7㎞ 가량 떨어진 곳. 수풀이 가득한 데다 사람이 사는 마을과도 꽤나 동떨어져 있다. 지난 3일 현장을 찾았으나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차로 10분여를 달리고 나서야 겨우 주민을 만날 수 있었다. 한 주민은 “80~90대 노인이 10명중 8명인 마을이기 때문에 저녁뿐만 아니라 낮에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형사들이 처음에 주목했던 인물은 이씨를 가장 마지막으로 목격한 남편 박씨. 강도의 우발적 범행이라기엔 사체 훼손 정도가 너무 잔인해 면식범 소행으로 추정됐기 때문. 게다가 범행 추정 시간대 박씨의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평소 부부 관계가 좋지 않았고 자주 다퉜다는 주변의 증언도 나왔다.
그러나 수사 초기부터 2년 넘게 박씨의 집을 들여다 본 형사들은 어떠한 범행 증거도, 특이점도 찾지 못했다. 세면기와 수도배관을 정밀 감식하고 박씨가 렌터카를 사용한 흔적이 있는지 살폈지만 혐의점은 없었다. 이씨와 박씨 주변인물 300명 가까이를 수사했으나 모두 알리바이가 있어 추가로 용의선상에 올릴만한 인물도 없었다. 사체 이동 경로의 차량 수만대를 분석하고, 사건 전단 수천장을 뿌렸지만 제보도 특별한 게 들어오지 않았다. 이씨 집 근처 주민은 “2008년부터 이듬해까지 형사들이 매일같이 다녀갔고, 최근에도 종종 들른다”고 전했다.
사체를 절단한 흉기라도 특정되면 좋겠지만 수사는 쉽지 않았다. 김 병리과장은 시중에서 파는 각종 톱과 절단기들을 구해 돼지뼈를 수 차례 잘라 사체 절단면과 비교해봤다. 그러나 쇠톱이라는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상품명과 판매처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시신을 다섯 부분으로 잔혹하게 절단한 뒤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범인. 처참하게 짓밟힌 피해자와 진실을 애타게 기다리는 유가족을 위해 경북경찰청은 지난해 9월 미제사건수사팀을 꾸려 이 사건을 되짚는 중이다. 최명호 미제사건수사팀 수사관은 “범인이 증거를 인멸하려 한 행적들 자체가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며 2,400쪽에 달하는 사건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넘겨보고 있다.
대구ㆍ포항=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이 기사는 과거 수사 기록과 형사, 부검의 설명 등을 토대로 재구성했습니다. 관련 제보는 경북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 (053)429-2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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