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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특집] 댁의 명절은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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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건 1997년 2월. 설 연휴를 지낸 주부들을 위한 ‘명절 후 증후군 피로를 잡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 건강면에 실린 게 시작이었다. 아마도 피로를 해소해준다는 노하우보다 명절증후군이란 준의학적 진단명이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이것은 전통이란 이름으로 사회가 내게 가한 질병이다’라는 인식. 그 후 20년, 대한민국 사회는 매년 두 차례 가족간 갈등과 불화의 홍역을 치를 때마다 이 유사질병을 소환해 왔다.
명절증후군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개혁파와 그래도 명절의 전통은 중요한 것이라는 보수파 사이의 내적 대립이 그저 소모적으로 반복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변화는 암암리에,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던 듯하다. 조상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며느리들만 정성과 수고를 다해야 한다는 봉건적 사고는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소수의 개명한 남성들을 부엌으로 불러들였다. 교통이 발달한 근거리 생활권에 살면서 명절에만 가족들이 모여 잔치를 벌여야 할 이유도 딱히 없는 바, 가족여행이 명절의 취지를 살리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급진적 인식도 차츰 확산되고 있다.
세상이 달라지면 삶의 형태가 달라지고, 삶의 형태가 변하면 문화도 바뀌게 마련이다. 농경사회 집단·씨족문화에 기반한 전통만 고수하기보다 가족 누구도 괴롭지 않은 새로운 명절 문화를 고민해 볼 때다. 꼭 극적인 변화를 도모할 필요는 없다. 다 함께 오순도순 모여 우리 가족에게 적합한 명절 문화를 도출해 내는 과정 자체가 가족 간의 정을 나누고 우애를 돈독히 하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대안적 모델을 통해 명절 문화를 업그레이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근본 없다”는 비판이 무색하게 명절의 근본 취지를 잘 살린 ‘모두가 즐거운 명절’이었다.
분배정의형: 모두 공평하라
“작은 집 동서가 2년 전부터 차례 지내는 당일 아침에 와요. 다들 결혼해 아이들이 있으니 모이기 번잡하다는 거죠. 큰집 맏며느리인 저는 밤 열시가 넘어도 부엌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조카에게 듣자 하니 동서네는 인사동에 전통문화체험을 하러 갔다는 거예요. 여기 버젓이 살아 숨쉬는 전통문화가 있는데, 누군 그걸 체험하러 인사동에 놀러 가고, 누군 그 전통 지키겠다며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만 하고. 이게 뭔가요?”(박모씨·41세)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일임한 명절 문화는 흔히 여성들끼리의 부엌 전쟁으로 번진다. 갈등의 근원을 해소하지 못하고 여자들끼리 대립하는 것은 건강한 반응이 아니지만, 눈 앞의 불평등에 보살처럼 굴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시누이는, 동서는 왜 편하게 쉬고 있냐는 불만이 말은 못해도 얼굴에는 드러나고, 뚱한 며느리 얼굴에 시어머니는 한 말씀 하시며, 말대답하지 못한 며느리는 설거지감을 싱크대에서 쿵쾅거리면 그것은 명절이 아니라 대참사. 노동불평등을 분배정의 구현으로 바꾸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하다.
셋째 며느리인 강지순(가명·63)씨네는 “팔순을 내다보는 큰 형님의 결단으로” 뒷말이 나오지 않는 분배정의를 실현했다. 조상 잘 모시는 것이 자식들 잘 되는 지름길이라는 신념 하에 제사와 차례에 온 정성을 다해온 큰 동서가 3년 전 전향, “앞으로는 전날 올 필요 없다”는 해방 선언과 함께 동서와 며느리들에게 포트럭 파티 형식으로 적정 노동량을 할당한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둘째 동서는 바쁘니 햅쌀과 과일을 사 가고, 전업주부인 강씨는 동그랑땡과 동태전, 버섯전을 부쳐가며, 큰집의 큰 며느리가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 무나물 등 오색나물을 무쳐 온다. 작은 며느리는 갈비와 불고기 등 고기 음식을 해오고, 큰 형님은 사놓은 떡과 당일 아침 지은 탕국, 밥을 올려 차례상을 차리면 끝이다. 강씨는 “각자 해온 음식을 싸 들고 모이니 번거롭지 않아 좋고, 누구나 맡은 일이 있으니 불평불만이 쏙 들어갔다”며 “무엇보다도 조카며느리들 표정이 박꽃처럼 환하고 예뻐 좋다”고 말했다.
양성평등형: 여성만 노동은 양반집에 없다
“시댁이 손위 동서와 시누이까지 모두 공평하게 부엌일을 하는 분위기라 큰 불만은 없는데, 빈둥거리며 쉬고 있는 남편만 보면 울화가 치밀어요. 아내의 고충이라도 잘 다독여 주면 덜 미울 텐데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냐’며 도리어 역정을 내기도 하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는 슬픈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어요.”(유모씨·32세)
명절 노동의 주체로 여성을 못 박아놓은 전통은 한국사회가 가장 오래 또 강력하게 규탄해온 바다. 본래 여성이 아닌 남성이 직접 제수를 장만하고 조리해 조상에게 올리는 것이 반가의 법도였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사회적 압력이 높아진 만큼 어른들 눈치 보여 부엌에 못 들어갔던 남성들도 가정의 평화를 위한 호연지기를 서서히 가동하기 시작했다.
장남인 대학원생 임찬영(가명ㆍ29)씨는 9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기제사와 차례 모두 어머니와 직접 차려 지낸다. 남동생이 잔심부름을 도와 굳이 비율로 따지면 어머니가 45%, 임씨가 40%, 남동생이 15%를 담당한다고. “제가 남동생 데리고 전은 다 부치고요. 어머니는 나물과 고기, 식혜를 맡아 하세요.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는데,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출근 전 계란 후라이 해놓고 나가시는 걸 보며 자랐어요. 여자가 더 일해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죠.” 임씨는 후에 결혼해도 부인한테 일 ‘시킬’ 생각은 없다. “내 아버지니까 내가 더 잘 챙겨드리고 싶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부부니까 같이 일할 수는 있겠지만 ‘시킨다’기 보다는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거겠죠.”
노동해방형: 사서 차려 자유 얻으라
“시어머님께서 명절 음식은 반드시 한 보따리씩 싸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세요. 총 여덟 집이 모이니까, 어마어마하게 전을 부쳐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친 전을 싸가서 다 먹으면 또 모르겠는데,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항상 버리게 되거든요.”(손모씨·38세)
명절 음식이란 게 기본적으로 노동집약적이다. 해당 식재료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지향하는 조리법이다. 스테이크를 구워 20명이 먹는 건 비용 문제로 불가하지만, 동그랑땡은 얼마든지 20명이 먹을 수 있다. 식재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노동력으로 대체하는 이 음식들은 그러므로 누가 만들어도 힘들고 고되다.
인천에 사는 김소영(가명ㆍ54)씨는 명절에는 모두가 즐거워야 하다는 철학으로 차례 음식도 ‘쓱’ 쇼핑한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미용사이다 보니 명절 음식 할 엄두가 안나 사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좋은 걸 왜 진작 안 했을까’ 싶게 만족도가 높았다. 백화점이나 마트보다 시장이 ‘가성비’가 좋아 주로 시장을 이용하는데, 전은 만원이면 1㎏을 살 수 있고, 녹두전은 2장에 5,000원, 식혜는 1리터 한 병에 4,000원이다. “전 1.5㎏에 녹두전 4장 사면 온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더라고요. 불고기도 양념되어 있는 걸로 2만원어치(1㎏ 조금 넘음) 사면 되고요.”
김씨는 “장봐서 만들어 먹는 것보다 사는 게 비싸기는 하지만 힘들게 만들 시간에 가족들과 오붓하게 쉬는 게 훨씬 더 좋더라”며 “앞으로도 명절 음식은 사다 먹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남편도 처음에는 돈 아깝게 왜 사다 먹느냐고 했지만, 이젠 군말 없어요. 제가 명절에 불평 안하고 기분 좋으니까, 이젠 돈이 아깝지 않은가 봐요.”
차례상을 통째로 구매하는 집도 급격히 많아지는 추세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올해 완제품 주문량은 전년 추석 대비 51%, 올 설 대비 133%나 늘었다. 특히 50, 60대 고객의 주문량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차례상 사서 지내는 차례가 ‘철없는 며느리들’의 소행만은 아닌 것이다.
자유여행형: 명절에는 여행이지
결혼 3년차인 워킹맘 김모(32)씨는 미혼인 둘째 시동생이 이번 추석에 9일짜리 해외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상했다. 시댁이 음식을 많이 차리는 문화는 아니지만, 아들도 빠지는 차례에 며느리는 가서 상을 차려야 한다니 노동의 합목적성이 당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여름휴가도 아직 다녀오지 못한 김씨는 “한국에서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이 9일씩 휴가를 받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서 “원하면 떠날 수 있는 시동생의 자유가 부럽다”고 말했다.
장기휴가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은 긴 명절 연휴를 최고의 여행 대목으로 만들었다. 2014년 이후 전통적 여행 성수기인 7, 8월보다 명절연휴가 있는 2월과 9월의 여행상품 매출이 더 높아졌고, 가족 단위 여행객 비율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12일 하나투어에 따르면, 이번 추석 연휴 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 단위 여행객은 전년보다 20.3%나 증가했다. 지난해 1만3,000여명이었던 자녀 및 친인척 동반 여행 예약이 올 추석(13, 14, 15일 출발)에는 1만6,000여명으로 3,000여명이나 늘어난 것이다. 여행지로는 동남아가 41.8%로 가장 많았고, 중국(24.4%), 일본(23.6%), 남태평양(6.2%), 유럽(2.3%), 미주(1.6%) 순이었다.
워킹맘 변혜경(43)씨는 12일 중3인 딸아이와 태국 푸켓 부근의 카오락으로 여행을 떠났다. 평소 학원 스케줄 때문에 여행 갈 시간을 빼기 어려운 사춘기 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다. 10년 전부터 시작된 명절 여행으로 시댁 문화도 바뀌었다. 시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도 차례 대신 삼삼오오 그룹을 지어 해마다 콘도로, 펜션으로 가족여행을 떠나고, 몇 년에 한번씩은 변씨네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한다.
“처음 시도할 때는 좀 어려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른들도 명절이면 여행 갈 생각에 들떠 굉장히 즐거워하세요. 가까이 살면서 자주 만날 일이 있으니까 가족들 대부분 꼭 명절을 치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명절 연휴 동안 여가를 즐기고, 그럼 미안한 마음에 더 잘하게 되기도 하고요. 아주 바람직한 변화죠.”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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