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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에 빠진 2030 “눈치 보는 사회, 힙합은 짜릿한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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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슴 성형 했어요!”
지난 8일 방송된 KBS ‘해피투게더’에서 래퍼(랩 음악을 하는 가수) 제시는 이렇게 ‘폭탄 선언’을 했다. 그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쑥 과거를 밝히자 진행자 유재석과 박명수, 전현무 등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서 제시는 한 술 더 떠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그럼 이게 진짜 같느냐”고 ‘셀프 디스’(자신의 치부나 과오를 오히려 드러내 대화의 소재로 삼는 것)를 한 뒤 “솔직히 (수술을) 했으면 밝히는 게 정상이지, 감추고 안 한 척 하는 게 더 싫다”고 말했다. 함께 출연한 래퍼 산이는 그런 그를 보고 “진짜 스웩”(힙합 뮤지션이 잘난 척을 하거나 으스대는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요즈음 인기를 끈 다른 래퍼들의 곡을 들어보면 제시의 당당함이 그만의 일탈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성 래퍼 경연 프로그램 ‘언프리티 랩스타3’에 출연 중인 나다는 최근 발표한 곡 ‘무서워’에서 “외힙(외국 힙합) 뮤비(뮤직비디오)에서 튀어나온 듯한 탈 아시아급 볼륨감”이라며 자신의 몸매를 치켜세웠다. ‘대세 래퍼’ 비와이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퍼즐’이란 곡에서 “브랜드 평판 섭외 1순위/말 안 해도 대세 인증/너의 두 눈이 확인 했잖아/내가 나온 순간 다 게임 끝”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유교적 잣대로 해석하자면 이들의 발언은 “무슨 여자가, 쯧쯧”이라거나 “젊은 사람이 자아도취가 심하다”는 식의 지적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힙합을 좋아하는 2030세대에서는 그런 비난을 찾아보기 어렵다. 직장인 정성호(32)씨는 “자기 자신에 대해 당당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멋져 보인다”며 “힙합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20년 만에 주류로 올라선 힙합
국내 1세대 래퍼로 꼽히는 ‘드렁큰 타이거’가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1999년 2집 수록곡 제목)고 물은 지 17년이 흘렀지만, 힙합이 대중과 가까워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엠넷 ‘쇼미더머니’와 ‘언프리티 랩스타’ 같은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마니아들만 즐기던 힙합은 이제 당당한 주류 문화로 올라서고 있다.
2012년 첫 번째 시즌 때만해도 작가들이 직접 홍대 앞 클럽을 찾아 다니며 출연자를 섭외한 것으로 알려진 랩 경연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는 5번째 시즌을 맞은 올해 지원자가 9,000여명에 달했다. 지난 7월 15일 전파를 탄 쇼미더머니5 마지막회는 전체 평균 시청률이 3.0%였다. 특히 20대 여성 시청자들의 평균 시청률은 4.6%나 됐다. 지난달 19일 방송된 언프리티 랩스타3 4회도 20대 여성의 시청률이 3.2%, 30대 남성은 3.0%로 전체 평균 시청률(2.1%)을 크게 웃돌았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지난 20년 동안 국내에서 힙합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그 중에서도 주로 남자들이 즐기는 음악이었다”며 “하지만 힙합 프로그램을 계기로 이젠 남녀노소가 거부감 없이 즐기는 주류로 올라섰다”고 평가했다.
10대 때부터 힙합 음악을 자주 들었다는 직장인 성모(28)씨는 요즘 ‘힙합이 대세’라는 것을 실감한다. 성씨는 성인이 되면서 힙합을 직접 하고 싶었는데, 그가 대학생이던 2007년에는 힙합을 즐길 만한 곳이 대학 내 힙합 동아리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힙합 프로그램 덕에 힙합 공연과 모임이 눈에 띄게 늘어 ‘진입장벽’이 훨씬 낮아졌다. 성씨는 “쇼미더머니 예선만 보더라도 주변에 흔히 볼 수 있을 듯한 일반인들이 나와 프로 가수 못지않은 실력을 자랑한다”며 “10년 전보다 힙합이 훨씬 보편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쇼미더머니5에서 심사위원을 맡은 래퍼 쿠시(33) 역시 “힙합을 처음 시작한 10대 시절에만 해도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했고 주변의 편견도 심했는데 지금은 잘하면 인정받는 시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힙합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것은 이제 흔한 광경이 됐다. 인기 곡 순위를 집계하는 가온차트에 따르면 7월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상위 10곡 가운데 힙합 음악은 ‘데이 데이’(비와이ㆍ2위) ‘포에버’(비와이ㆍ3위) ‘호랑나비’(보이비ㆍ7위) ‘맘 편히’(사이먼도미닉&그레이&원ㆍ10위) 등 4곡이나 포진했다. 지난해 7월 순위에는 단 한 곡도 들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요즘 인기 가요 순위는 힙합 곡이 들어있지 않으면 심심할 정도”라며 “힙합이 전 세대가 소비할 수 있는 ‘놀이’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아가는 분위기”라고 평가했다.
힙합 음악이 인기를 끌면서 콘서트도 부쩍 늘었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올 들어 인터파크에서 티켓이 판매된 힙합 공연은 총 82개나 됐다. 인터파크가 판매하지 않은 공연이나 무료 공연 등을 포함하면 올해 전국에서 열린 힙합 공연은 100개가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남 눈치 보는 사회, 힙합은 해방구”
힙합이 2030의 귀를 잡아 끄는 까닭은 무엇보다 ‘신나기 때문’이다. 조모(28ㆍ여)씨는 “다른 장르에서는 찾기 힘든 라임이나 플로우, 펀치라인 등이 힙합 음악의 매력”이라며 “10년 전만 해도 멜로디가 무겁고 가사에 욕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 대다수였는데, 요즘은 경쾌하고 밝은 비트의 힙합 곡이 더 많다”고 말했다. 여기에 유명 가수들의 피처링(다른 래퍼의 곡에 참여해 노래나 연주를 도와주는 것)이 증가한 것도 힙합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자리잡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지금 힙합이 인기를 끄는 이유를 단순히 ‘방송의 힘’과 ‘몸을 들썩이게 하는 비트’로만 돌릴 수는 없다. 최모(27)씨는 힙합이 전하는 내용이 천편일률적인 국내 가요들과 다르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는 “대부분 가요들은 사랑 아니면 이별 내용이고, 그게 아니면 영어 가사로 도배된 곡에 칼군무를 곁들이는 식이 아니냐”며 “비슷비슷한 노래에 지루해졌는데 힙합은 이런 노래들과는 확실히 차별화가 된다”고 말했다. 발라드 같은 느린 멜로디의 곡에 치부나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는 건 어색하지만 힙합은 자기 자랑, 풍자, 디스 등 다른 장르에서는 소화하기 난해한 소재까지 다룰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힙합의 성격은 ‘다른 사람 눈치 보며 할 말 못하고 사는’ 2030에게 특히 쾌감을 준다. 신성희(29ㆍ여)씨는 “개인적인 의견을 직설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내는 힙합의 특징에 열광하는 것”이라며 “기성세대 눈치를 보고 할말을 삼켜가며 버텨야 하는 사회에 질려버린 우리 세대에게 짜릿한 출구가 되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힙합 전문 플랫폼 무브더크라우드는 힙합을 시험, 실연, 아르바이트, 취업준비, 입시, 결혼 등 2030세대가 흔히 갖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역시 “사회적으로 억눌려 있는 2030의 시대상과 만나 힙합의 인기가 증폭된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요즘 젊은 세대는 자기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고 그를 통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이전 세대보다 강하다”며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내는 힙합이 환영 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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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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