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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ㆍ일제ㆍ한국…역사를 품은 오피스거리 소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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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공로는 광복 전 이름이 부적절해서 새로 붙여진 이름이다. 광복 전에는 하세가와초(長谷川町)로 불렸다. 하세가와는 대한제국을 겁박해 식민지로 만든 군사령관 이름이다. 일본은 그 공을 기려 대한제국의 상징적 장소이자 도시개조사업의 핵심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 하세가와는 1916년 총독으로 다시 한반도에 발을 디뎠고, 1919년에는 3ㆍ1운동을 무력 진압했다. 광복 후 지워야 할 이름 1순위였다.
일본인 상업거리였던 ‘혼마치(本町)’가 이순신 장군을 기려 ‘충무로’로, ‘고카네초(黃金町)’가 을지문덕장군을 기려 ‘을지로’로 바뀐 것은 다시는 주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한제국을 강탈하고, 3ㆍ1운동을 짓밟은 이름인 하세가와초는 광복 후 당연히 주권 회복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역사에 무지했던 우리는 조선에서도 아주 작은 역사의 파편을 찾아 ‘작은공주길’(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살았다는 사실에서 유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우리 근대사를 지우고 왜곡한 일본의 의도가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은 고종 황제를 무능한 군주로 만들고, 대한제국을 역사에서 지웠다. 하세가와초가 소공로가 되고 만 이유다. 광복과 함께 역사와 정신을 회복했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못했다. 나라를 뺏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왜, 어떻게 나라를 뺏겼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그래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소공로가 중요한 이유다. 소공로는 황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을 위해 개설된 길이고, 각국으로부터 인정받은 대한제국이 독일의 하인리히 친왕을 최초 국빈으로 맞이했던 영빈관이 위치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오욕의 역사를 안은 오피스거리였지만, 해방 후에는 우리의 경제성장을 목도한 곳이다.
그런데 이 소공로가 다시 위험해졌다. 1980년대 이후 소공로가 퇴락하면서 재개발 추진 사업자의 먹이가 된 것이다. 사업자는 역사의 현장을 지우려 한다. 정확하게는 부수고 깨끗하게 다시 짓겠다고 한다. 건물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50년, 100년 넘은 건물이 안전할 수 있을까? 오래된 건축유산이 안전 진단에서 A등급을 받으면 그것은 건물이 아니다. 건축유산은 오래되면 취약해진다. 그러나 유산의 역사성과 진정성이 중요하기에 구조 보강을 통해 건물의 생명을 늘리고 안전을 확보한다. 그런 방법이 확보됐고 검증까지 됐는데도 불구하고 안전을 핑계로 다시 짓겠다는 것은 건축유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다.
북촌을 보자. 북촌의 역사성을 이유로 한옥을 보존하자고 했을 때 많은 개발론자들이 “당신이라면 이렇게 낡은 집에서 살 수 있겠냐”며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때 철거론자들이 옳았다면 오늘의 북촌이 가능했을까? 소공로변 근대건축은 아픈 역사의 증거일 뿐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디딤돌이다. 일제강점을 이겨내고, 경제성장을 이룩해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온 현장은 지켜져야 한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눈앞에 펼쳐질 역사현장의 미래는 우리 몫이라는 것을.
안창모 경기대대학원 건축설계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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