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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선수니까 무조건 응원? ‘국뽕’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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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4월22일 오후 9시경, 축구팬들의 인터넷 공간 ‘아이러브사커’에서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에버튼의 경기를 앞두고 팬들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한 누리꾼이 “에버튼 힘내”라는 댓글을 올리자 곧이어 “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좀 응원합시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당시 박지성이 맨유에서 뛰고 있으니 한국인은 맨유를 응원해야 한다는 이 뜬금없는 주장을 놓고 대화에 참여한 누리꾼 대다수는 “왜 한국인이면 맨유를 응원해야 하느냐” 는 반응을 보였다.
# 2012년 7월15일 유튜브에 공개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인기 가도를 달릴 무렵이었다. 유튜브에서의 인기를 발판으로 싸이가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자 미디어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싸이에 대한 질문을 맥락 없이 아무에게나 하는 경우였다. 심지어는 2012년 10월4일 미국 국무부 정례브리핑 당시 한 한국 기자가 국무부 대변인에게 “싸이를 아느냐”는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 한국 누리꾼들은 질문 영상을 보고 “창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리꾼들 사이에서 과도한 애국주의를 지적하는 단어가 ‘국뽕’이다. 트렌드 지식사전 2권(김한표, 인물과사상사)에 따르면 국뽕은 국가와 필로폰(히로뽕)의 합성어로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도취돼 무조건적으로 한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말한다. 축구팬들은 ‘제한맨’(제발 한국인이면 맨유 응원합시다) 이라는 줄임말로 이 행태를 조롱했다. 이 줄임말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손흥민(24)의 소속팀 토트넘의 이름을 붙여 ‘제한토’라고도 변주되는 등 ‘국뽕’을 조롱하는 대표적인 유행어로 자리했다.
외국인들에게 대뜸 ‘~를 아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행태에는 ‘두 유 노(Do you know)’라는 의문문이 붙어 끊임없이 변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두 유 노’에 김치, 불고기, 비빔밥을 붙이거나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묻는 ‘두 유 노 독도’ 등이 있다. 한 누리꾼은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을 대비해 외국 사람들은 한국에 올 때 이런 옷을 입으라며 외국인들이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진에 ‘나는 싸이, 강남스타일, 독도, 김치, 박지성, 김연아를 알고 있다’라는 문구를 합성하기도 했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 또한 심하다. 특히 한국을 홍보하겠다는 명분 하에 공적 자금이 투입된 콘텐츠는 ‘국뽕’이라는 지적을 받기 일쑤다. 2010년 공개된 애니메이션 ‘김치 전사’(감독 강영만)가 대표적인 예다.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 김치 홍보를 위한 2D 애니메이션을 발주해 정식 입찰 과정을 거쳐 약 1억5,000만원을 지원받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저급한 그림 수준과 김치로 돼지독감, 사스, 광우병 등을 물리친다는 황당한 스토리 때문에 누리꾼들로부터 도리어 “보는 내가 부끄럽다”(유튜브 PBJUN), “창피함은 우리 몫”(네이버 mnb1****)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광고 또한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예가 CJ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CGV에서 영화 상영 직전 나오는 광고다. CGV는 ‘프리미엄 코리아’라는 제목을 붙인 이 광고에서‘전 세계 0.07%의 땅을 가졌지만 이제는 전 세계인을 팬으로 가진, 이토록 큰 자부심을 주는 나라가 우리의 나라, 대한민국임을’이라는 문구를 내보냈다. 이에 대해서도 “‘국뽕’광고가 계속 되는 한 CGV를 가지 않겠다. 영화 보기 전에 기분이 불쾌해진다”(트위터, @jirimyul) 는 반응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국뽕 콘텐츠’에 대한 반발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문화평론가 정윤수(한신대) 교수는 “국가의 약속이 부도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도 ‘국뽕’ 이야기가 나오면 반응이 대체로 냉소적”이라며 젊은 세대가 가진 ‘국뽕’에 대한 반감을 설명했다. 정 교수는 “과거에는 개인의 몸과 정신 등을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근대화가 진행됐다”며 “이는 단순히 국가의 강제로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개인이 국가가 원하는 방향에 몸을 맡겨야 생존이 가능했기에 자발적인 참여 양상을 보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자발적 참여에도 ‘국가가 이끌어준다’는 국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세대는 ‘스펙’ 쌓기 등 자기계발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청년실업, 빈곤 등의 현실에 처하면서 이를 더 강하게 느끼게 된 것”이라고 젊은 세대가 보내는 냉소의 원인을 진단했다.
실제 젊은 세대는 ‘국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20대 전문 연구기관 대학내일20대 연구소가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미국, 독일, 브라질 7개국 대학생 1,357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 4월6일 발표한 ‘글로벌 7개국 대학생 가치관 비교 2016’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ㆍ공공기관을 신뢰하는 한국의 대학생들은 15.8% 수준으로 7개국 평균 30%의 절반 수준이다. 특히 정부ㆍ공공기관을 신뢰하느냐는 세부 질문에 대해서는 11.5%만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자국의 경제 성장이나 정치적 발전, 개인의 삶 향상 등 사회의 발전가능성에 대해 묻는 질문에서도 37.6%만이 긍정적으로 답변해 7개국 평균 51%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노력에 대한 공정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15%만이 긍정적으로 대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 교수는 “지금 젊은 세대의 부모 세대는 젊은 시기에 교련복을 입고 오전 6시에 기상하는 등 전체주의 문화가 강했던 시기에 청춘을 보냈다”라며 “군사문화의 일상화를 혹독히 겪은 만큼 그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는 세대다. 자녀들과 TV를 보면서도 국가주의적 광고나 캠페인을 보면 ‘아직도 저런 걸 하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지금 2030세대의 부모 세대”라고 덧붙이며 젊은 세대의 가정 환경적 요인도 짚었다.
현재 교육 현장이 민족주의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고 있는 점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교육부의 2009 개정교육과정 지침에 따르면 고교 ‘생활과 윤리’교과서 ‘다문화 사회의 윤리’ 단원은 “다른 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자기 문화에 대한 정체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태도를 바탕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함으로써 다문화적 시민의식을 확립”하는 것을 교육 목표로 하고 있다. 문화 존중에 방점이 찍힌 교육을 받고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외국의 문화 콘텐츠를 직접 마주하는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 ‘우리 민족’을 강조하며 한국 문화가 최고라는 자긍심을 주입하려 드는 ‘국뽕’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정진욱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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