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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상사 전 상서, 더딘 소통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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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과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사연이 흘러나왔다. 이른바 꼰대 특집. 뭇 상사들의 각종 꼰대 행태들이 귀를 잡아당겼다. 헉, 오금이 저렸다. 하필 내가 방송국에 넘긴 부장과의 일화가 당사자와 함께 있는 이 시간에 소개되다니. ‘이제 죽었구나’ 눈치를 살피는데 부장이 비웃는다. “아직도 저런 인간이 있어?” ‘그건 너’라는 머리 속 외침은 “그러네요, 누굴까요”라는 안도로 뒤바뀐다.>
웃다가 소름이 돋았다. 후배가 라디오에서 들은 실화라며 전해준 저 우스개가 ‘너도 조심하라’는 경고로 들렸다. 저의(底意)를 캐기 위해 꼬치꼬치 묻다가 다시 소름이 돋았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차장은 꼰대 아님”이라는 후배의 억지 승복이 되레 ‘꼰대 인증’이라 읽혔다. 아, 그게 아닌데. 소통의 길은 좁고도 좁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나 소통을 말하지만 아무도 소통하지 않는 희한한 세상에 살고 있다. 정치인들은 저마다 소통을 약속하고, 식자들은 소통을 정의하고, 직장에선 소통을 채점하고, 학교에선 소통을 주입하지만 우리의 소통은 왜 이리 더딘지, 살아생전 이 땅에서 그 소통이란 것을 맛볼 수나 있는지 의문이다. 상명하복 경쟁만능 일등제일의 촘촘한 씨실과 학연 지연 계층의 끈끈한 날실로 짜진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서 몸부림치는 형국이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게 많을수록 입에 달고 사는 소통은 오히려 맘에서 멀어진다. 사비 들여 후배들 명절 선물을 챙기고, 펜으로 쓴 크리스마스카드를 팀원들에게 안기곤 했던 나의 계산된 정성은 상대를 향해 그악해지는 언행의 면죄부로 변질됐다. “그것밖에 못해?” “기본이 없다” “너는 안 되겠다” “이해할 수 없네.” 내가 경멸했던 앞선 그들을 시나브로 닮아가며 관성이 붙었다.
지난해 미국 국립공원(총 407개)을 100곳 넘게 다니면서 참 소통의 실마리를 만났다. 알래스카 드날리(Denali)부터 플로리다 에버글래이즈(Everglades)까지 저마다 뽐내는 대자연과 위인, 역사만큼 공원지킴이(Ranger)들에게 매료됐다. 실은 공원 관련 문제들을 풀면 아이들에게 주는 특별한 배지(Junior Ranger Badge)가 탐났다. 아홉 살 아들은 무지 싫어했지만 수집벽을 채울 기념품으로 그만한 게 없었다.
그들은 문제풀이를 검사하면서 틀린 답에 사선을 긋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생각을 물었다. 턱도 없는 어눌한 얘기에 “훌륭해(wonderful)” “굉장해(awesome)” 등 추임새를 연발했다. 자세는 아이 눈높이에 정확히 맞췄다. 진득이 듣고 나선 자신의 의견(사실은 정답)을 듣겠냐고 물었다. 자신이 옳다고 얘기하지 않고 아이가 답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힌트를 줬다. 공원 정보를 얻으려고 기다랗게 줄이 늘어서도 10분 넘게 오로지 아이에게만 집중했다. 여행객들은 불평커녕 아이가 배지를 받는 순간 열렬히 축하했다.
마지못해 응하던 아이는 몇 차례 체험하더니 대화에 자신이 붙고, 상대 말에 귀 기울여 오답을 스스로 찾고, 문제풀이 시간도 절반으로 줄이는 등 적극적으로 달라졌다. 그렇게 배지 138개를 모았다. 이후 아이가 고집을 부릴 때면 공원지킴이 흉내를 내는데, 효과 만점이다. 소통은 더뎌서 빨랐다.
‘문제아는 없고 문제부모만 있다’는 가르침은 직장,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경청으론 부족하다, ‘아낌없는’ 경청이어야 한다. “나는 그래도 들어준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듣다’가 아니라 ‘주다’에 방점을 찍는다. 일방적으로 말하기 위해, 상대 의견을 제압하기 위해, 빠른 일 처리를 위해 듣는 시늉만 한다. 그래서 소통의 싹이어야 할 말은 독이 된다. “가장 단순한 진실은, 말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메시지성경 마태복음 5장 22절)
공원지킴이들에게 물었다. “일도 바쁜데 왜 그리 아이들을 경청하나.” 한결같이 답했다. “For Future Generations(미래 세대를 위해)!” 아이들, 후배들, 부하직원들, 우리 곁엔 미래가 강물처럼 흐른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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