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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Biz리더] 인종차별 이 악문 승부사, 그래픽 기술로 AI 세상 펼치다

입력
2017.08.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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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때 미국 건너 간 대만 출신

“혁신가는 기꺼이 위험 감수해야”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엔비디아 제공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엔비디아 제공

엔비디아(NVIDIA)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정보기술(IT) 업체 중 하나다.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래픽 칩셋을 만드는 회사 정도로 알고 있겠지만, 엔비디아는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의 핵심 기술을 보유한 업체로 주가를 올리고 있다. 생산공장을 운영하지 않고 반도체의 개발ㆍ설계만 담당하는 팹리스(fabless) 업체라서 인텔이나 삼성 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내실은 그 어느 회사보다 탄탄하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발간한 기술분석잡지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선정한 ‘2017년 가장 스마트한 50대 기업’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24년간 회사를 이끌고 있는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젠슨 황(54)이 있다. 지난해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 400대 갑부에 가장 낮은 순위인 395위(5명과 동률)로 턱걸이했을 만큼 재산 규모가 크진 않지만,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아마존, 구글 같은 기업들이 기술 도입을 위해 그를 찾을 만큼 세계 IT 업계에서 무시 못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 열풍과 맞물려 엔비디아의 주가는 지난 5년 사이 9배 이상 상승했고, 앞으로도 추가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는 게 업계 평가다.

강인함과 끈기, 집중력을 지닌 승부사

젠슨 황은 1963년 화학공학자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와 함께 고국 대만을 떠나 태국으로 이주했는데 1973년 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두 아들의 장래를 걱정한 부모가 자식들을 미국에 있는 아이들의 삼촌 집으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젠슨 황은 만 9세, 형은 10세 때였다. 영어에 서툴렀던 삼촌 탓에 젠슨 황은 당초 계획했던 사립학교가 아닌 기숙학교에 들어갔고,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으며 매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학교에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 뒤 방과 후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벌었고 틈틈이 동네 탁구 클럽에서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16세에 대학에 진학할 만큼 학업 성적이 뛰어났는데 탁구 실력도 취미활동 수준을 넘어섰다. 15세 때는 미국 전국대회 주니어 복식 부문 3위에 오르기도 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 이미 기혼으로 두 명의 자녀까지 있었는데 대부분의 수업을 주말 비디오 강의로 들으면서도 모든 과목에서 최고 점수를 받을 만큼 성적이 뛰어났다고 한다. 강인함과 끈기, 집중력을 두루 갖춘 승부사 기질은 엔비디아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젠슨 황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바꿔놓은 건 오리건주립대 재학 시절 연구실에 걸려 있던 마이크로프로세서 업체 AMD의 포스터였다. 포스터에는 게임콘솔을 작동시키는 프로세서 칩이 그려져 있었다. 평소 컴퓨터와 게임을 좋아했던 그는 이 포스터에 끌려 대학 졸업 후 AMD에 취직했다. 젠슨 황은 AMD에서 게임과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에 특화된 CPU(중앙처리장치, Central Processing Unit)를 만들고 싶었으나, CPU 시장은 인텔 천하였고 업계 2인자인 AMD에서 뜻을 이루긴 쉽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며 스탠퍼드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그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자”며 두 명의 엔지니어가 찾아왔다. 썬마이크로시스템 출신의 커티스 프림과 크리스 맬러카우스키였다. 그래픽 처리 기능이 열악했던 컴퓨터에 답답함을 느꼈던 젠슨 황은 이들과 의기투합해 1993년 엔비디아를 설립했다. 세 사람은 사무용 기기에 한정돼 있던 PC가 멀티미디어, 특히 게임에 특화된 기기가 될 것이라 내다보고 2D와 3D를 처리할 수 있는 그래픽 칩셋을 만들기로 했다. 모든 벤처회사가 그렇듯 엔비디아의 시작은 초라했다. 서른 살의 젠슨 황과 두 명의 동업자는 캘리포니아의 작은 아파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가진 돈은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도 그들의 가능성을 알아 본 서터힐과 세콰이어캐피털 등 벤처투자사들이 2,000만달러를 투자해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엔비디아 GPU가 탐재된 컴퓨터로 가상현실(VR)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엔비디아 제공
엔비디아 GPU가 탐재된 컴퓨터로 가상현실(VR)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엔비디아 제공

실패 속에서 희망을 찾다

젠슨 황과 동료들은 오랜 연구개발 끝에 1995년 9월 첫 번째 제품인 그래픽카드 ‘NV1’을 내놓았다. 2D, 3D에 음성데이터까지 처리할 수 있게 만든 야심작이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제품이었다. 당시 PC 사용자들에겐 지나치게 비싼 고사양 제품인데다 독자적인 기술로 호환성이 떨어졌다. 1,000만달러를 투자한 NV1은 참패했고, 시장을 후발업체 3Dfx에게 내줘야 했다. 엔비디아의 기술력에 주목한 일본 게임업체 세가가 차세대 게임기용 그래픽 칩셋 개발에 수백만 달러를 지원한 덕에 후속작 ‘NV2’를 개발할 수 있었으나, 이 역시 시장성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출시가 좌절됐다.

회사는 파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젠슨 황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을 더 열심히 하는 젠슨 황의 성격이 엔비디아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1997년 회사를 재정비하고 남은 자금을 쏟아 부어 만든 후속작 ‘NV3’, 공식 명칭 ‘리바 128’이 대히트를 기록한 것이다. 퀘이크, 파이널판타지7 등 당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3D 게임에 최적화한 강력한 3D 처리 능력이 게임 사용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3Dfx, ATI 등 경쟁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리바 128의 성공에 한껏 고무된 엔비디아는 1999년 주력 상품이 되는 지포스 시리즈의 첫 제품 ‘지포스 256’을 내놓으며 시장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지포스 256은 엔비디아가 그래픽 칩셋을 GPU(그래픽처리장치, Graphics Processing Unit)라 부른 첫 제품이기도 하다. 일부 CPU에 의존하던 기능을 그래픽 칩셋이 도맡아 하게 되면서 CPU와 대등한 능력을 갖춘 기기라는 것을 강조한 명칭이다. 당시만 해도 경쟁사들은 ‘홍보성 용어’ 정도로 취급했지만 GPU는 2000년대 들어 업계의 공식 명칭으로 자리잡았다. 요즘은 CPU와 GPU가 결합된 APU가 주로 쓰이지만, 게임이나 고사양 그래픽 작업을 하는 PC에는 독립된 GPU가 쓰인다. 인텔이 지배하는 APU 시장을 제외한 독립 GPU 시장에선 엔비디아가 지난 1분기 72.5%의 점유율을 기록하면서 인텔, AMD와 격차를 크게 벌리고 있다.

기술 최우선 경영 통해 인공지능 선두주자로

엔비디아가 그래픽용 GPU를 개발하는 데 그쳤다면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회사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젠슨 황은 CPU가 하지 못한 일을 GPU가 해낼 것이라 믿고 매출의 20% 이상을 꾸준히 연구개발(R&D)에 투자하며 6개월마다 하나씩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독보적인 기술력 확보에 꾸준히 애를 쓴 결과 엔비디아는 인공지능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인공지능을 목표로 한 노력은 아니었지만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젠슨 황은 “20년간 GPU 개발에만 전념하다 보니 인공지능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순차(직렬)적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CPU와 달리 GPU는 동시에 병렬 처리 방식으로 대용량 데이터를 반복 연산하는데 적합하다.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핵심기술인 딥러닝을 위해선 컴퓨터 내부에서 단순 연산이 짧은 시간에 수없이 반복돼야 하는데 여기에 수백, 수천대를 병렬로 연결시킨 GPU가 쓰인다. 지난해 이세돌 9단과의 바둑대결에서 승리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알파고에도 엔비디아 GPU 176대가 탑재됐다. GPU가 단순한 그래픽 처리 장치가 아니라 인공지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엔비디아는 GPU의 이 같은 특성을 활용해 그래픽 처리 능력을 기존 CPU가 수행하던 연산 처리에 쓰는 범용GPU(GPGPU) 기술을 개발했고 2006년에는 프로그래밍 플랫폼인 쿠다(CUDA)를 내놓았다. 엔비디아의 쿠다와 범용GPU 기술 덕분에 인공지능과 딥러닝, 빅데이터 산업은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덩달아 엔비디아의 주가도 폭등했다.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알리바바 등 글로벌 IT 기업들은 엔비디아의 기술을 자사의 데이터센터에 도입했다.

젠슨 황과 엔비디아의 다음 도전은 자율주행차다. 딥러닝을 활용한 사물인식이 자율주행차의 핵심 기술이란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런 행보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테슬라의 자율주행차에 차량용 슈퍼컴퓨터 ‘드라이브 PX 2’를 공급하기로 했고 아우디, 메르세데스 벤츠, 볼보, 도요타, 바이두 그리고 SK텔레콤과도 자율주행차와 관련한 파트너십을 맺었다. 엔비디아에게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차는 아직 여물지 않은 열매와도 같다. 여전히 매출의 대부분이 일반 GPU에서 나오고, 인공지능용 범용GPU와 자율주행차용 프로세서는 둘을 합쳐도 20% 미만이다. 인텔, 구글 등의 매서운 추격에 앞으로 시장 판도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경우든 젠슨 황과 엔비디아가 쉬운 길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젠슨 황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발명가와 혁신가는 기꺼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며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시장이 받아주지 않을 수 있지만, 실패가 두렵다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패하더라도 빨리 털어내고 다시 새로운 걸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관련기사] ☞ 엔비디아의 성장 가능성 어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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