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약물에 손댄 내 딸, 20대 삶을 통째로 빼앗겼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1
고교 졸업 후 꽃다운 나이에 나락
병원ㆍ경찰서ㆍ교도소 오가면서도
중독 늪에 갇혀 지옥 같은 삶
#2
기소유예→ 집행유예→ 실형
옥살이 돌아온 딸 “아는 언니네 가요”
또다시 마약 작대기 꽂으러 가
#3
“끊을 때까지 병원 나오지 마라” 경고
“아비의 시선에서 세상에 알리고파
마약 의존자들에 살 기회를 주길…”
2005년 겨울, 3남매 중 막내 딸내미가 체포됐다. 경기 평택경찰서라더라. ‘하… 또냐.’ 지(제) 팔뚝 혈관에 주삿바늘을 또 꽂았던 게다. 필로폰(향정신성의약품) 투약으로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출소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같이 약하고 놀다 먼저 붙잡힌 사내 녀석이 언급해 경찰이 불렀더니 딸 소변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단다.
심란한 얘기를 다 듣고 가구공장(인천 소재)에서 평소처럼 작업을 했다. 프레스기가 오른손 엄지 마디 하나를 잘랐다. 꿰매어 붙였지만 1㎝가량 짧아졌다. 대수롭지는 않았다. 20대를 통째로 뺏겨버린 딸 아이를 속절없이 바라본 아픔에 비하랴. 돌면 돌수록 파멸로 가속하는 마약 중독의 ‘회전문’ 안에 갇힌 가엾은 내 딸!
올해 81세 권 아무개인 나는 아비 시선에서 딸의 잃어버린 10년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스무 살에 처음 꽂은 주황색 약 작대기(필로폰 주사기)를 서른 살까지 끼고 살며 처참하게 망가진 내 딸. 세상은 범죄자라지만 곁에서 지켜본 내 눈에는 약을 도저히 못 끊어내는 병을 앓는 환자가 분명했다. 그 얘기를 하고 싶다.
한 순간에 지옥이 열렸다
딸은 상고를 졸업한 1998년 처음 마약류에 손을 댔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그 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가던 은행 채용 문이 닫혔다. 월급 60만원 받는 단순업무에 상심이 컸다. 모녀 관계도 틀어졌다. 따로 나온 딸은 하숙집(부산 소재)에 살면서 채팅으로 만난 낯선 남성과 함께 필로폰 주사기를 꽂았다. 나락으로 빠져든 순간이었다. 나는 이미 아내와 이혼한 터라 손쓸 틈이 없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계속 투약을 해온 딸은 다시 함께 살게 된 애 엄마의 뒤늦은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애 엄마는 툭하면 새벽에 귀가하던 딸이 갑자기 살이 확 빠진 걸 수상히 여겼다. 딸내미 옷장을 뒤져 발견한 투약 얘기가 가득 적힌 일기장과 주사기를 경찰에 넘겨줬다. 필로폰에 빠지면 밥맛이 뚝 떨어진단다.
딸은 처음 수사기관에 걸려서 치료조건부 기소유예를 받았다. 일정 기간 치료를 받는 대신 재판에 넘기지 않는, 일종의 선처였다. 그러나 딸은 또 투약했다. 이듬해 재판에 넘겨져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집행유예는 이미 약에 빠진 딸에게 전혀 경고가 되지 못했다. 보호관찰을 채 받기도 전에 다시 약에 손 대 결국 1년6개월 실형을 살았다.
2001년 처음 수의를 입고 옥살이한 딸은 감방에서 ‘아는 언니’라는 사람을 만났다. 딸은 이듬해 출소한 뒤 부산에서 내가 있던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에선 계속 약을 할 거 같다고 딸이 말했다. 화목하지 못한 집 구석에서 자랐고, 애 엄마와 마찰이 많아서 나는 딸을 자극하지 않으려 애썼다. 딸의 내면에 범죄자 낙인이 찍힌 거 같아 안쓰러웠다. 대인 기피증이 의심됐다. 매일 출근할 때 한마디만 했다. “제발 편하게 쉬고 있거라.”
뻔히 알아도 무기력했다
그런 딸은 서울 봉천동에 함께 살던 2004년부터 ‘아는 언니’ 집을 찾아갔다. 거기 간다, 그러면 뻔했다. 팔에 마약 작대기 꽂으러 가는 거였다. 성매매업소인 안마방 영업을 하는 동거남을 둔 ‘아는 언니’는 경기 남양주시에 살았는데, 그때도 한껏 약에 빠져 있었다. 그 동거남도, 그 무리 서너 명도 그랬다. 문제되는 집이란 걸 나는 충분히 짐작했다. 엄청나게 고민했다. ‘딸을 개 목줄 하듯 묶어서라도 집에 붙잡아 놔야 하나.’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가더라도 돌아오기만 해라.’ 사람들은 나를 정신 나간 자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집안에 여자 마약중독자가 있으면 사정이 달라진다. 거짓말하고 다른 데 갈 때만큼 불안한 것이 없다. ‘그냥 친구 집’ ‘누구 아는 사람 집’이라 둘러대고 돌아다니면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딸 주변 사람 중에도 마약중독자가 더러 있었다. 내 딸이나 그들은 교도소를 그렇게 드나들고도 출소했을 때 “아이고 이제 약을 딱 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아는 언니네로 가는 게 덜 불안했다. 더 몹쓸 짓을 하거나 죽게 내버려둘 것 같지는 않은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걸까. 어차피 당시 딸은 내가 강하게 막은들 소용이 없었다. 그만큼 더 강하게 뛰쳐나갈 터였다. 공장에 돈벌이하러 나가는 처지에 계속 붙잡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세대는 남들 앞에선 눈물 흘리지 않는다고 배웠는데 혼자 있을 때 절로 눈물이 났다.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끙끙 앓는, 그런 세월을 보냈다. 그만큼 힘들었다. 딸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난 얘가 청주교도소나 목포교도소에 있을 때 한편으로 마음이 제일 편했다. 적어도 큰 사고는 안 날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 다음 마음 편한 건 병원에 있을 때다. 딸이 거기 가면 대체로 내가 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솔직히 딸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는 게 소원일 정도였다. 맨 정신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깊은 갈등에 빠졌던 답답한 딜레마가 있었다. 딸의 마약 값을 대납하는 문제였다. 딸은 당시 제3금융(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아 필로폰을 맞았다. 딸이 서류 보호자란에 내 이름을 써놔서 상환이 밀리면 어김없이 내게로 전화가 왔다. 그럴 때마다 미칠 지경이었다. 수도 없이 고민했다가 결국 갚기로 했다. 나중에 기적이 일어나서 딸 아이가 약을 끊을 수도 있는데, 얘가 그걸로 또 좌절해서 약 생각날까 봐 그랬다. 나는 2003~2005년 총 700만원을 갚았다. 공장 일로 월 100만~120만원 벌 때였다.
헤어날 수 없는 악몽
지금 떠올려도 2006년은 아찔하다. 참 기가 찼다. 딸이 “아빠가 죽었다”고 차 안에서 난리를 쳤다. 바로 옆에 내가 멀쩡히 있는데 자꾸 내가 악귀한테 죽임을 당했다고 울면서 고래고래 외쳤다. 아는 언니네 집에서 투약하다가 급성 중독 증상이 확 올라와 딸을 데려오던 길이었다. 아는 언니는 “얘 옥상에서 뛰어내릴 것 같으니 집에 데려가서 재우라”고 전화했다. 그 지경이 된 딸을 직접 보고 실감했다. ‘끝내 인생의 바닥을 쳤구나.’ 그 일로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날까 봐 집안의 날카로운 것은 다 치웠다. 아주 드물더라도 약물중독자 중에 환각 상태에서 사고 치는 사람도 있으니까.
여동생을 입원시킨 내 아들은 “이러다 객사하겠다”라며 아는 언니네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때까지 내 딸은 약을 주던 ‘상선’을 부는 법이 없었다. 보호해 줘야 약을 또 탈 수 있을 테니까. 내 아들은 복수심이 아니라 오로지 동생을 살리겠다는 심정이었는데, 그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약을 받곤 했던 딸은 또 검찰에 불려갔다. 아는 언니는 딸에게 처음에는 공짜로 필로폰을 주다가 나중에는 판매하는 남성을 연결해줬다. 원수 같은 존재지만 그나마 그때 딸이 죽기 전에 경고해준 건 감사하다.
2007년 아는 언니네의 작업으로 또 재판에 넘겨진 딸은 선고 전날에도 주삿바늘을 꽂았다. 네 살 많은 어떤 사내와 함께 투약했다. 약을 한 티가 났다. 딸에게 물었다. “너 (필로폰에) 또 손댔느냐?” “네.” “남은 게 더 있냐?” “네.” “이리 내놓아라.”
나는 딸에게 받은 약물을 변기에 뿌리고 물을 내렸다. 출근하면서 한마디 했다. “자수해라.” 딸은 잘못을 인정했다. 무릎을 꿇더니 제 손으로 112에 신고했다. 자수한 데다 유치장에서 발작을 일으켜 고대안산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을 정도로 그때는 딸 상태가 죽기 직전의 폐인 꼴이어서 그런지 선처(치료조건부 기소유예)가 떨어졌다. 그때는 약을 준 남자만 처벌받았다.
도무지 악몽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딸은 그 뒤로도 약에 손을 뻗었다. 2008년에는 파출소에서 “딸을 데려가라”는 전화가 왔다. 딸이 약에 취해 택시 기사에게 계속 “제가 원하는 대로 가 달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기사가 어이가 없어 파출소에 내려줬다. 경찰은 단순히 ‘정신 나간 여자’로만 봤던 모양인지 풀어줬다. 더는 참다 못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약 끊을 때까지 병원에서 나오지 마라.” 결국 딸은 마약류 중독 치료보호지정기관인 국립부곡병원에 들어갔다. 한 줌 희망이야 버리지 못했지만 딸이 중독 회전문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봤다.
나는 최근까지 사람들을 피해 살았다. 마약한 딸을 둔 아버지였으니까. 세상 어디에, 친척에도 제대로 말 못하고 입을 완전히 닫고 살았다. 낙인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왼쪽 귀가 어두운 데, 그마저 감사히 여기며 살았다. 한국일보 기자가 건넨 명함을 받고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 내가 거의 20년 만에 사랑하는 딸의 흉을 잔뜩 늘어놓으며 어렵게 말을 꺼낸 이유는 이렇다. ‘누구든지 걸릴 수 있는 병이 마약 중독이다. 정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약 의존자들이 문제가 있더라도, 편견이 없을 수는 없더라도, 사람답게 살 기회를 줬으면.’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권씨 부녀는 지난달 18일 인터뷰 당시 “우리사회의 마약류 중독 또는 의존자를 범죄자로 낙인 찍기보다는 치료와 재활, 그리고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로서 우리사회가 함께 끌어안아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실명을 밝히기로 했으나, 이후 모든 가족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부득이 익명으로 보도가 나가길 희망했고, 한국일보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권씨 부녀의 극복기는 시리즈 마지막(8회)에 소개합니다.
[마약리포트, 한국이 위험하다]
출소자와 보름 동안 합숙, 투약 경험 100명 인터뷰
마약은 가깝고도 먼 이야기다. 대중매체를 통한 자극적인 잔상 때문에 익숙한 모습으로 각인돼 있지만, 극소수 사람만이 경험하는 다른 세상으로 인식됐다.
마약을 경험한 사람들은 과거를 감추고 위축됐으며, 마약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흥미 위주로 바라본다. 한국일보는 마약이 그들만의 예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깊숙이 퍼진 이웃의 문제라는 시각으로 접근했다.
마약은 빠르게 확산돼 이미 우리사회의 건강성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2016년 전체 마약류 사범은 1만4,214명으로 전년보다 20% 증가했다.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는 암수범죄(暗數犯罪)는 20~30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가상화폐나 온라인 거래 등 마약 유통 수단의 첨단화도 한 요인이겠지만 조직폭력배나 유흥업소 종사자, 유학생 일탈로 치부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는 무조건 그들을 외면하기보다는 가감 없이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마약 투약 경험이 있는 출소자들과 보름 동안 함께 합숙하면서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 달 동안 100명 가까운 투약자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고, 수사기관 의료기관 종교기관 법조계 정부부처 국회 시민단체 인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6개월 동안 전국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 3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우리보다 앞서 치료와 재활의 중요성에 눈을 뜬 일본의 민간 재활기관을 방문해 대안을 고민했다.
특별취재팀=강철원ㆍ안아람ㆍ손현성ㆍ김현빈ㆍ박재현 기자
<글 싣는 순서>
1 도돌이표: 절망과 참회의 악순환
2 상상 초월: 청정하지 않은 대한민국
3 좀 이상해: 개운치 않은 수사와 재판
4 마약 양성소: 전문가 키우는 교정시설
5 보름 합숙: 쉽지 않은 재활의 길
6 갈 곳이 없다: 취업과 치료 거부하는 사회
7 일본 가 보니: 민간이 주도하는 재활센터
8 재사회화: 극복하고 있어요 응원해 주세요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