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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세] 7대양 누빈 신밧드의 고향, 오만

입력
2018.03.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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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다만세는 ‘다시 만난 세계’의 줄임말입니다. 국제뉴스에서 소외됐던, 그러나 흥미로운 나라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연재입니다.

고대부터 해양 강국으로 이름을 떨쳤던 오만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이른 8세기에 이미 7대양을 항해했다. 1271년에 항해를 시작한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물론, 신대륙을 발견해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콜럼버스보다도 300년이나 앞서 세계를 돌아본 것이다. 주로 북동계절풍이 부는 11~12월에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을 거쳐 중국 광저우로 향한 이들은 대추야자와 비단, 도자기 등을 물물교환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따금 들렀는데, 고려 현종 15년(1024년)에 아라비아 상인 100명이 찾아와 중동지역 특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중동에서 중국까지의 항해는 왕복 8개월이 넘게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주변국들은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지만 오만은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아라비아 반도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아시아 등 다른 대륙으로 뻗어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선박 제조 기술을 발전시켜 누구보다도 빠르게 장거리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7대양 여행기를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옮긴 ‘신밧드의 모험’의 주인공 신밧드가 바로 오만 사람이다. 바닷길을 이용해 세계를 누빈 나라 ‘오만’으로 떠나보자.

고대 시대부터 해양 강국으로 명성을 드높인 오만의 바닷가 풍경. 플리커 제공
고대 시대부터 해양 강국으로 명성을 드높인 오만의 바닷가 풍경. 플리커 제공

인류 최초의 무역로 ‘향료길’의 중심지

그 옛날 오만은 해상제국이기 전에 유향 재배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실제 오만의 최남단 도시들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유향 재배지로, 고대부터 ‘향료의 도시’라 불렸다. 유향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한 뒤 바친 세 가지 예물 중 하나로, 우리에겐 낯설지만 중동 및 유럽 사람들에겐 매우 귀하고 값비싼 향료였다. 이들은 향을 피우는 종교의식에서부터 상처 치료까지 다양한 목적으로 유향을 사용했다. 질 좋은 유향이 대량으로 생산됐던 오만은 인류 최초의 무역로인 ‘향료길’의 시작이자 중심지였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유향 무역이 정점에 달했던 2세기엔 매년 약 3,000톤의 유향이 그리스와 로마, 지중해 연안 등으로 수출됐다.

오만에 큰 부를 안겨준 유향 나무. 플리커 제공
오만에 큰 부를 안겨준 유향 나무. 플리커 제공

향료무역으로 부를 쌓은 오만은 발달된 항해술을 바탕으로 대형 범선을 구축해 중국에까지 이르는 동서해상무역에도 뛰어들었다. 당시 오만인들이 주변 여느 나라들보다 빨리 장거리 항해에 나설 수 있었던 건 고대부터 축적된 선박제조에 대한 지식과 노하우 덕이다. 오만 범선의 가장 큰 특징은 뱃전의 판재를 못으로 결합하지 않고 질긴 섬유실로 엮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배는 태풍에는 약했지만, 산호초에 좌초됐을 때 충격을 유연하게 흡수해 쉽게 부서지지 않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또 선체 중간부에 당시 유행했던 사각이 아닌 삼각 돛을 달아 역풍을 보다 잘 이용할 수 있었다. 이 같은 형태의 배를 서양에선 ‘다우선’이라 불렀는데, 다우선은 중세 오만 선박의 주축을 이뤘고 근세 들어서도 유럽 제국주의에 맞서 해양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만의 한 바닷가 풍경. 플리커 제공
오만의 한 바닷가 풍경. 플리커 제공

서구 열강과 어깨 나란히… 빛나는 해상제국의 영광

16세기와 17세기에 걸친 포르투갈의 지배로 황폐화됐던 오만은 1744년 아흐마드 이븐 사이드가 등장하면서 해양제국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현재의 알 부사이드 왕조의 첫 번째 지배자인 아흐마드는 오랜 식민지배로 분열된 국민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후퇴했던 해양활동을 되살리기 위해 해양정책을 전략적으로 추진했다. 그렇게 구축된 강력한 해군과 상선단은, 향료는 물론 당대 최고의 인기 상품 중 하나였던 커피와 설탕을 사고 팔며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해양제국의 명성이 절정에 달한 건 후계자 사이드 이븐 술탄 때이다. 그는 아랍의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힐 만큼 오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선물한 인물이다. 20여 척의 무장상선으로 천연 광물이 풍부한 동부 아프리카 해안을 식민지로 만들기도 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그는 무자비한 탄압 대신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며 상인 연합을 구축했다. 그 결과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상업이 발달했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던 당대 동서 무역에서 동부 아프리카 해안선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동부 아프리카 무역 중심지로 떠오른 잔지바르(현 탄자니아)는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며 이후 무스카트와 함께 오만의 공동 수도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해안 정비를 마친 사이드 이븐 술탄은 기울어진 서구 열강과의 관계도 재정립했다. 그는 영국 ㆍ미국ㆍ프랑스ㆍ포르투갈 등의 견제에도 중앙지배권을 견고히 유지하며 이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국제관계를 맺고, 상설 무역거래를 이어갔다. 실제 오만은 1840년 당시 아랍권 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에 사절을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1842년엔 주영 오만 대사를 두기도 했다.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있는 술탄 카부스 그랜드 모스크 내부. 플리커 제공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있는 술탄 카부스 그랜드 모스크 내부. 플리커 제공

20세기 르네상스의 도래

오만의 영광은 사이드 이븐 술탄이 세상을 떠나며 급격히 빛을 잃었다. 그는 생전 두 아들에게 각각 잔지바르 지역과 오만 지역을 맡겼는데, 각자의 지역에 대한 두 아들의 영향력이 확고해 좀처럼 통합이 되지 않았다. 결국 둘은 서로의 영역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 사이 오만을 호시탐탐 노리던 영국이 끼어들어 강제로 평화협정을 맺었고, 한동안 유지되는 듯 했던 협정은 이후 잔지바르와 오만이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잔지바르가 떨어져 나간 오만은 내륙과 해안지대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 차이로 갈라서면서 또 한 번 분열됐다. 내리막을 걷던 오만에 1860년대 등장한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해상무역을 잇는 오만의 존재가치는 한없이 작아져만 갔다.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전경. 플리커 제공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 전경. 플리커 제공

그 후 100여 년 간 무너져 가기만 하던 오만을 재건한 건 카부스 빈 사이드 국왕이다. 올해로 재위 48년차를 맞이한 그는 오만에서 ‘현대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카부스가 집권하기 전까지 오만은 나라 문을 굳게 닫았고, 도로ㆍ병원 등 사회간접시설 등을 전혀 구축하지 않았다. 카부스는 1970년 즉위 직후부터 국내경제 개발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주변 산유국에 비해 원유매장량이 적었지만 석유수출로 얻은 이익을 국가 인프라 구축과 교육, 보건 등에 효율적으로 배분해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1996년부터는 ‘비전 2020’을 수립해 석유자원 고갈에 대비한 산업다변화도 모색하고 있다. 특히 오만 정부가 가장 힘을 쏟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인 제조업의 경우, 국내총생산(GDP) 비중을 1995년 4.7%에서 2020년까지 15%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카부스는 이 밖에도 ‘종교적 관용’이란 이바디파(이슬람 종교 수니파의 한 갈래로 현재 오만인들의 대부분이 이바디파이다) 철학의 기본 원칙에 따라 다른 종교에도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오만은 정통 이슬람 국가임에도 종파 분쟁이 없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최근 유엔(UN)의 인권보호,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금지 협약 등을 법률로 채택해 중동지역에선 보기 드물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높은 편이다. 오만 여성들은 남성과 동일하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하며, 각종 부처 장관이나 해외 대사로 임명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유향 나무에서 유향을 채취하는 모습. 플리커 제공
유향 나무에서 유향을 채취하는 모습. 플리커 제공

불투명한 후계, 멸종위기에 처한 유향나무

수십 년간 오만을 잘 이끌어온 카부스에게도 큰 고민이 하나 있다. 후계자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카부스는 현재 이혼해 독신으로 살고 있으며 슬하에 자식이 없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에 따르면, 카부스의 사촌들 중 한 명인 아사드 빈 타리크 알사이드가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평가되며 최근엔 그가 국왕의 특별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국왕 서거 후 가족들로 구성된 통치자문위원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후계자를 지명하는 관습이 불안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최근엔 이슬람국가(IS)의 테러 위협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만큼, 권력에 공백이 생길 경우 나라가 한 순간에 정정불안에 휩싸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향도 최근 멸종위기에 처하며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유향의 가치가 날로 높아지면서 금전적 이익을 노리는 불법 채취꾼들이 무차별적으로 유향을 채집한 게 화근이었다. 실제 오만 환경보호사무소의 연구에 따르면 유향나무 개체 수는 최근 13년간 약 85% 감소했다. 정부가 뒤늦게 유향나무 살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역부족이란 지적이다.

한국인에겐 ‘오만 쇼크’로 각인

오만이란 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각인된 건 2004년 아시안컵 축구 2차 예선 때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쁨에 취해 잠시 긴장의 끈을 놓았던 우리나라 대표팀이 만만하게 봤던 오만에 3대 1로 패한 것이다. ‘오만 쇼크’란 이름이 붙은 이 사건으로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경질위기에 몰렸다. 그는 다음 경기에서 또 한 번 굴욕적인 패배를 안기며 결국 사령탑에서 밀려났다.

최근 오만에선 K뷰티가 인기를 끌며 우리나라 화장품이 점차 주목 받고 있다. 한국의 대(對)오만 화장품 수출액은 2016년 기준 46만 달러로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2014년부터 내리 3년간 연평균 100% 이상 성장하며 폭발적으로 시장을 확대해가고 있다. 특히 가성비가 좋은 중저가브랜드들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고 한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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