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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재개] 노모를 씻기던 때수건이 명품 ‘때르메스’가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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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목욕재개’는 '목욕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의미로, '초보 목욕커'의 눈으로 바라본 목욕 세계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대중목욕탕, 찜질방, 온천 등을 망라한 한국의 목욕 문화를 탐구하고, 습관적으로 씻는 목욕이 아닌 '더 잘 씻는 법'을 고민합니다.
프랑스 명품 ‘에르메스(Hermes)’의 창업가, 티에리 에르메스는 훗날 한국에 ‘때르메스(‘때밀이'와 ‘에르메스'를 합친 별칭)’가 등장할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1,000만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에르메스 가방은 매장의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고 2~3년은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다. 거액을 낼 능력이 있어도 바로 가질 수 없는 ‘희소성'에 명품 마니아들은 열광했다.
정준산업의 ‘요술 때밀이 장갑'은 ‘이태리타월' 가격의 30배 수준인 6,000원이다. 제때 사기도 힘들다. 한창 입소문이 났던 2015년에는 한 달 이상 대기해야 구매할 수 있었다. 공장이 마비될 정도로 주문 전화가 밀려오자 배정준(41) 대표는 한동안 휴대 전화 전원을 끄고 주문을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서른 명은 족히 되는 인파가 공장 앞으로 찾아와 줄을 서서 기다렸다. ‘고가'와 ‘희소성'을 모두 갖춘 이 때밀이 장갑에 소비자는 에르메스를 본뜬 ‘때르메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 “아직도 박재범 팬카페의 ‘그분’에게 고맙다”
지난달 28일, 330제곱미터(100평) 남짓한 대구 달서구의 정준산업 공장에는 35대의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한쪽에서는 다섯 명의 직원이 손으로 하나하나 장갑의 실밥을 다듬고 있었다. 러시아산 자작나무에서 뽑아낸 천연섬유로 만든 장갑으로 피부를 문지르면 때가 가루가 되어 피부와 분리된다. 장갑을 물에 넣고 흔들면, 분쇄된 때가 뽀얗게 카푸치노 거품처럼 떠오른다고 해서 ‘때푸치노’라 불리기도 한다. 3초에 한 개씩 팔린다는 바로 그 장갑이다.
‘때르메스 품귀현상'의 시작은 2013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배 대표는 1999년 정준산업을 창업했지만, ‘하루에 두 켤레 팔면 많이 팔았다’ 싶은 날이 10년째 반복됐다. 그러다 어느 날 하루에 100켤레 이상 주문하는 전화가 이어졌다. 이상하게 여긴 배 대표가 “어떻게 알고 주문했냐"고 묻자, 다들 “박재범 팬카페에서 보고 전화했다”고 답했다. 알고 보니, 평소 생활용품을 자주 공동구매하던 팬카페 회원들이 “써 보니 좋더라"며 공동구매를 진행한 것. 배 대표는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며 “최초의 글 게시자를 찾기 위해 팬카페에 글까지 남겼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 목장갑에 이태리타월을 오려 붙였던 최초의 때밀이 장갑
‘때르메스’ 장갑은 1998년 대학생이던 배 대표가 중소기업청 주관 ‘전국대학생창업경연대회'에 출품했던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당시, 배 대표의 아버지인 고 배향섭 정준산업 회장은 매주 노모를 손수 씻겼다. 시중의 네모난 때수건은 벗겨지기 일쑤인 데다 몸을 잡고 밀기도 힘들어, 목욕을 한번 할 때마다 파김치가 됐다. 이에 배 대표가 아버지의 수고를 덜기 위해 목장갑에다가 손바닥 모양으로 자른 이태리타월을 접착제로 붙여 선물했던 게 ‘때르메스’ 장갑의 전신이다.
배 대표는 그 해 창업경연대회 대구ㆍ경북 지역 1등을 차지했지만, 20대에 호기롭게 시작했던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빚더미에 앉고 신용불량자 처지에 놓이기도 했던 그 시기를 배 대표는 ‘긴 터널'이라 표현했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며 방황할 때, 아버지 배 회장이 “그럼 내가 한번 해 보겠다"며 정준산업을 지켰다. 아버지가 노모를 살피고,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생각했던 효심이 연 매출 60억 원의 청년 사업가를 탄생시킨 셈이다. 배 회장은 지난 달 19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배 대표는 “아이디어는 내 것이지만 10년이 넘도록 회사를 지킨 건 아버지였다”며 “앞으로도 연구ㆍ개발에 매진해 건실한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하늘에서 아버지도 응원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대구=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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