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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공동체 자유주의로 낡은 보수 구해내다

입력
2018.03.05 04:40
5면
2007년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박세일. 박정희 이후의 보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인 지식인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7년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는 박세일. 박정희 이후의 보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인 지식인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현실정치 뛰어든 참여적 지식인

“부유한 국민과 소프트파워 강국”

선진화 통한 富民德國 비전 제시

박정희주의 쇠퇴 과정서 새 이론

당시 위기에 빠진 보수세력 구출

#진영 넘어선 울림 작지 않아

“우리에게 남은 시간 별로 없다”

시대정신ㆍ국가전략 열정적 탐구

성장ㆍ개방에만 무게 중심 둬

분배ㆍ복지는 상대적으로 소홀

사상과 이념은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이념에 따른 보수사상과 진보사상의 구분은 철학사상과 사회사상,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분류처럼 사상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 우리 역사에서 보수 이념을 대표하는 사상가는 누구일까. 가장 먼저 주목하고 싶은 이는 박세일(1948~2017)이다.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 박세일은 보수 담론의 일대 혁신을 모색했다. 그 개혁 담론이 ‘선진화론’이다. 둘째, 박세일은 학문과 정치를 결합한 대표적인 경세가(經世家)였다. 경세가란 뜻을 이룰 상황이면 세상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학문에 전력하는 이를 말한다. 조선시대 정도전과 이이는 경세가의 전형이었다. 지식인의 정체성과 정치인의 정체성을 모두 가졌던 이가 박세일이다.

지식인 박세일은 서울대에서 법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는 정치사회로 나갔다. 김영삼 정부 청와대 수석비서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당 국민생각 대표가 그 사례였다. 정치인 박세일에겐 영광과 좌절이 공존했다. 그러나 지식인 박세일이 발표한 선진화론은 우리나라 미래를 위한 개혁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박세일이 돌연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를 추모하는 칼럼을 썼다(“바우만과 박세일을 추모하며”ㆍ본보 2017년 1월 20일자). 지식인을 역할에 따라 ‘보편적 지식인’과 ‘참여적 지식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격동의 우리 현대사를 함께 해온 박세일은 보수적 개혁 담론을 통해 참여적 지식인의 길을 걸어온, 보수 세력의 ‘숨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나는 회고한 바 있다.

박세일의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창조적 세계화론’, ‘선진 통일 전략’은 박세일이 남긴 3부작이다. 이 가운데 2006년에 발표한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은 선진화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선진화론의 핵심 아이디어는 우리 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선진화가 새로운 국가 목표가 돼야 한다는 데 있다.

이 저작은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의 변화와 도전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국가의 목표와 이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선진화의 과제와 전략의 탐구를 거쳐, ‘누가 선진화를 이끌 것인가’에 대한 선진화세력 양성론으로 마무리한다.

‘공동체 자유주의’와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선진화론의 중심 개념이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선진화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철학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 이념을 뜻한다. 박세일은 연대성과 보완성을 공동체 자유주의의 구성 원리로, 정보공유와 협치를 운영 원리로 삼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성찰적 배려와 자율적 책임을 중시하는 공동체 자유주의는 보수의 새로운 정치 철학이라 할 만하다.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보수의 새로운 개혁 담론이다. 박세일은 5대 반(反)선진화 사상을 지적한다. 수정주의(신좌파적) 역사관, 결과평등주의, 집단주의(전체주의), 반(反)법치주의,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 그것이다. 이런 반선진화 경향에 맞서 그가 제시한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교육과 문화의 선진화(최고 핵심전략), 시장능력의 선진화(선진경제), 국가능력의 선진화(선진정치와 행정), 시민사회의 선진화(선진시민사회), 그리고 국제관계의 선진화(선진외교안보)다.

선진화를 통해 박세일이 이룩하려는 나라는 ‘부민덕국(富民德國)의 선진일류국가’다. 부민덕국은 부자 국민과 소프트파워 강국의 결합을 함의한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진정한 선진국, 진정한 일류국가는 국민 개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가 보장되면서 동시에 소프트파워 면에서 국제적으로 신뢰국가, 모범국가, 매력국가가 되는 것, 즉 덕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는 박세일. 경세가로서 박세일은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았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는 박세일. 경세가로서 박세일은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았다. 물론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진화론의 명암

광복 이후 우리나라 보수 담론을 주도해온 것은 이른바 ‘박정희주의’였다. 박정희주의의 핵심을 이룬 것은 성장제일주의와 반공권위주의였다. 빠른 경제성장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인권을 포함한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민주화 시대 개막 이후 박정희주의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과정에서 선진화론은 보수의 새로운 담론으로 각광 받았다. 앞서 말했듯, 개발독재론에 의존해온 보수 세력에게 박세일은 새로운 정치적·정책적 상상력을 제공한 ‘숨은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창조적 세계화론’(2010)에서 박세일은 선진화의 목표를 ‘창조적 세계화’로 명명하고, 이를 위한 10대 발전전략을 제시한다. 정신자본 중시, 지구촌과의 통합 확대, 세계화 부문과 비세계화 부문의 병진 발전, 인적 투자 효율 제고와 세계 지식생태계 활용, 성장·분배·환경의 공생적 발전, 고용극대화, 민관협치와 지방주권시대 추진, 자유민주주의 정착, 통일 한반도 시대에 기반한 세계 공헌 국가로의 도약, 현장과 역사를 중시하는 국가전략 수립이 그것이다.

이후 박세일이 주력한 것은 통일 담론이다. ‘선진 통일 전략’(2013)에서 그는 ‘선진화 통일론’을 선보인다. 선진자유·자주공영·민주평화를 대원칙으로 삼는 선진화 통일론에서 특기할 것은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변국을 상대로 한 적극적인 통일 외교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박세일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종합하여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전략을 구상하고 정교화했다.

돌아보면, 선진화론은 박정희주의에 이어 보수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 자유주의에 기반한 선진화 5대 핵심 전략은 당시 위기에 빠진 보수 세력을 구출했다. 박세일이 제안한 부민덕국은 보수적 ‘부국강병’의 21세기형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 자유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역설하고 있는 경세가 박세일의 3부작.
공동체 자유주의에 기반한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을 역설하고 있는 경세가 박세일의 3부작.

광복 이후 박세일만큼 시대정신과 국가전략을 열정적으로, 깊이 있게 탐구한 이를 찾기 어렵다. “사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별로 없다. 그러나 우리가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는 너무나 엄중하고 절박하다”는 그의 발언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 울림이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선진화론의 한계 역시 주목해야 한다.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2018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시대정신이 돼야 하는가. 여전히 민주화 시대인가, 아니면 선진화 시대인가. 외려 복지국가 시대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째, 선진화론은 성장과 개방에 무게 중심을 둠으로써 분배와 복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어느 나라든 불평등 해소가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불평등 완화를 위한 정책대안의 발굴과 추진은 매우 중대한 경제적·사회적 과제인 셈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

선진화란 말이 보여주듯 박세일의 꿈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사회에서 선진국에로의 진입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가치다. 선진국이란 국민 다수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문화적으로 성숙한 나라를 뜻한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선진국에 속한다.

주목할 것은, 우리나라와 같은 비서구사회에서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라는 점이다. 오늘날 선진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선진국이 됐다. 전후에는 일본과 아일랜드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선진국으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성장과 분배를 이뤄야 할 뿐만 아니라 성숙한 민주주의와 시민문화를 일궈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기존의 ‘모방 전략’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적·사회적 조건에 걸맞은 ‘창의적 표준’을 만들고 이를 실현해야 한다. 일본식 고용관계와 아일랜드식 협약모델은 자기 표준 성취의 구체적인 사례다. 이점에서 박세일이 제시한 서울 컨센서스 10대 전략은 ‘한국식 표준’을 세우는 데 여전히 작지 않은 함의를 안겨준다.

100년에서 100년으로 가는 전환기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는 다음세대와 그 세대의 아이들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줘야 할까. 그 나라가 선진국이라면 그러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지속적 혁신이다. 지식정보화가 가속화하는 현재, 이 지속적 혁신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 창의적 사유가 요구된다. 창의적 사유의 교육을 위한 사상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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