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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클린턴ㆍ김정일 회담 무산… 카터 등 퇴임 후 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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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ㆍ결렬의 역사 반복한 북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 북미정상회담의 초석이 마련되기 전까지 북미 양측은 대화와 결렬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클린턴ㆍ김정일’ 간 북미정상회담이 추진되던 2000년 전후는 ‘고난의 행군’으로 일컬어지는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한 북한의 대화 움직임이 적극적인 시기였다. 1999년 5월 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던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은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단 등을 골자로 한 ‘페리 프로세스’를 성사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를 발판으로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남북 간 해빙 무드와 함께 북미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논의도 시작했다. 2000년 7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백남순 북한 외무상이 북미 외교장관 회담을 연 데 이어 같은 해 10월 조명록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 김 위원장의 친서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조 제1부위원장은 클린턴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뜻을 전달했다.
이에 미국은 올브라이트 장관을 평양에 급파했다. 3박 4일 간 평양을 방문한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 위원장을 접견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위한 사전준비까지 끝마쳤다. 그러나 훈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북한방문을 앞두고, 당시 막바지 단계였던 중동평화 협상 때문에 방북을 포기했다. 당시 엄중한 상황에 놓였던 북한과 중동 중 클린턴 대통령이 중동을 선택한 탓이다. 그는 자서전 ‘마이라이프’에서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북한을 방문한 후 내가 방북한다면 미사일 협정을 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그래서 나는 후속조치(방북)를 취하고 싶었지만 중동 평화가 임박한 상황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도는 여행을 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부시 대통령 재임 기간 이어진 대북강경책과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추진이 맞물리면서 북미정상회담 논의는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다만 퇴임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사례는 수 차례 있다.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를 탈퇴하면서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미국은 1994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으로 보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핵 문제를 논의했고, 이는 북한 핵 시설 동결과 미국의 경수로ㆍ중유 제공을 골자로 한 북미 간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다. 카터 전 대통령은 2010년에도 방북, 강제노동형 8년을 선고 받은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를 석방시키고 함께 귀국했다. 2011년 4월에는 국제 원로 모임인 ‘디 엘더스(The Elders)’의 일원으로 또 방북했다.
재임 중 방북이 무산됐던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2009년 납북된 2명의 여기자 석방 교섭을 위해 방북했다. 중국계 미국인 로라 링과 한국계 미국인 유나 리는 2009년 3월 북중 접경지대에서 취재 중 북한 국경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각각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 받았으나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특별사면됐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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