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목욕재개] 오래된 동네 목욕탕의 변신은 무죄

입력
2018.03.24 18:00
구독

※편집자 주: ‘목욕재개(再開)’는 '목욕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의미로, '초보 목욕커'의 눈으로 바라본 목욕 세계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대중목욕탕, 찜질방, 온천 등을 망라한 한국의 목욕 문화를 탐구하고, 습관적으로 씻는 목욕이 아닌 '더 잘 씻는 법'을 고민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전북 군산에 위치한 영화빌딩에 남아 있는 폐업한 목욕탕의 굴뚝. 이혜미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전북 군산에 위치한 영화빌딩에 남아 있는 폐업한 목욕탕의 굴뚝. 이혜미 기자

그 많던 동네 목욕탕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동네마다 우뚝 솟은 굴뚝엔 목욕탕 주인들이 입을 맞춘 듯이 ‘○○장’, ‘○○탕’ 세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중앙탕’, ‘영화장’ 같은 친숙한 이름이 ‘○○사우나’니 ‘○○스파’로 바뀌면서 동네 목욕탕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데이터(www.localdata.kr)에 따르면, '목욕장업(공동탕업)'으로 지금까지 등록된 전체 13,933개 업소 중 8,467개소가 폐업을 신고했고 5,666개소만이 운영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치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목욕탕 간판과 굴뚝이 하나, 둘 사라지는 광경에 ‘대중목욕탕’의 쇠퇴를 체감할 수 있다.

그 많던 동네 목욕탕은 모두 허물어졌을까. 골칫거리로 남은 ‘폐업 목욕탕’의 모습을 살려 리모델링한 명소가 화제다. 전북 군산의 ‘영화장’은 미술관으로,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행화탕’은 카페와 문화공간으로, 종로구 계동의 ‘중앙탕’은 선글라스 브랜드의 쇼룸으로 탈바꿈했다.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재창조된 공간이 굴뚝은 물론이고, 내부 타일 등 목욕탕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

굴뚝과 물탱크 등 시설을 철거하는 비용이 만만찮은 이유도 있지만, 전문가는 목욕탕이 품고 있는 '아날로그 감성'에 주목한다. 김서준(토미) 도시로건축재생연구소 대표는 "최근 젊은 세대는 화려하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옛 것에서 의미를 찾고 재해석하는 것을 소위 '힙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목욕탕이 익숙한 세대는 향수와 추억을, 10대나 20대는 특이하고 빈티지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게 목욕탕 리모델링이 인기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전북 군산시 영화동의 이당미술관 건물 전경. '영화장'으로 영업 당시 1층은 남녀 대중목욕탕으로, 2층부터는 개인 욕실을 완비한 객실로 이용됐다. 이당미술관 제공
전북 군산시 영화동의 이당미술관 건물 전경. '영화장'으로 영업 당시 1층은 남녀 대중목욕탕으로, 2층부터는 개인 욕실을 완비한 객실로 이용됐다. 이당미술관 제공

■ 미술관으로 태어난 목욕탕 '이당미술관'

1969년에 지어져 48년 세월을 버틴 군산의 ‘영화 목욕탕’이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이당미술관이 들어선 ‘영화빌딩’은 군산 개항 이후부터 줄곧 목욕탕과 여관이 있던 건물로, 1969년 현대식 4층 건물의 모습을 갖춘 뒤 1층은 대중목욕탕, 2층 이상은 개인 욕실을 겸비한 휴식 공간으로 영업했다.

지난 3일, 기자가 찾은 이당미술관에는 목욕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련되지 않은 하늘색과 흰색 타일이 철거되지 않은 채 한 쪽 벽을 장식하고 있고, 천장에는 지난날 목욕탕 물이 흘렀던 배관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무엇보다 이곳이 목욕탕이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던 건, 숨길 수 없는 습하고 서늘한 기운이다. 벽이 타일로 마감되고, 오랫동안 습기를 먹어서인지 겨울엔 춥지만, 여름에는 시원하다.

[저작권 한국일보] 전북 군산에 위치한 이당미술관. 천장에는 목욕탕 영업 당시 타일 장식이 남아 있고, 목욕탕 용수를 나르던 배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혜미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전북 군산에 위치한 이당미술관. 천장에는 목욕탕 영업 당시 타일 장식이 남아 있고, 목욕탕 용수를 나르던 배관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혜미 기자

2008년 이후 상당 기간 빈 건물로 방치되어 '비둘기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던 영화빌딩은 1년 동안 리모델링을 거쳐 2015년 이당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개관 당시 특별 전시도 이름하여 ‘목욕하는 미술’전. 전시를 기획했던 김부식 큐레이터는 “처음 전시를 시작했을 때, 목욕탕이 다시 영업하는 줄 알고 동네 주민이 목욕 가방을 챙겨 온 에피소드도 있다”며 웃으며 말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 예정지에 위치한 행화탕. 도보 5분 거리에는 재개발 이후 높이 솟은 신축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았다. 축제행성 제공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 예정지에 위치한 행화탕. 도보 5분 거리에는 재개발 이후 높이 솟은 신축 아파트 단지가 자리 잡았다. 축제행성 제공

■ "예술로 목욕하세요" 예술가들의 공간 아현동 '행화탕'

사람들이 떠난 동네에선 ‘사랑방’이었던 목욕탕도 손쓸 틈 없이 쇠락했다. 1958년 문을 연 ‘행화탕’은 재개발 바람에 주민들이 떠나고, 인근에 찜질방 등이 생겨나면서 2008년 문을 닫았다. 젊은 예술가들이 마음껏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 저렴한 건물을 찾다가, 재개발 예정지의 폐업한 목욕탕에 닻을 내리면서 행화탕은 '예술로 목욕한다'는 기치 아래 2016년 카페와 전시장을 갖춘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 축제행성 제공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에서 다양한 예술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 축제행성 제공
지난해 행화탕의 '환갑잔치 목욕' 공연을 보고 있는 환갑의 주인공 김철영씨. 축제행성 제공
지난해 행화탕의 '환갑잔치 목욕' 공연을 보고 있는 환갑의 주인공 김철영씨. 축제행성 제공

행화탕은 예술 공간으로 거듭났지만, 목욕탕 시절 '사랑방 기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지난해 행화탕에선 이웃 주민 김철영씨의 환갑을 맞아 예술가들이 그의 삶을 모두 녹여낸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재개발 동네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한 주민과 관객들은 함께 호흡하며 김씨의 환갑을 축하했다. 김씨는 "아들과 딸도 자신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는데, 동네 청년들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공연까지 만들어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행화탕에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철거 일정이 정해지면 언제든 건물을 비워야 하고, 재개발 속도에 따라 시점만 달라질 뿐 언젠가는 철거될 시한부 처지다. 행화탕을 운영하는 축제 및 공연기획사 축제행성의 서상혁 대표는 "문을 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 마음의 때를 미는 공간으로 '예술 목욕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행화탕은 오늘도 목욕탕 굴뚝의 뜨거운 증기처럼 사라져 가는 동네에 대한 애정과 예술혼을 뿜어내고 있다.

1969년 목욕탕 영업을 신고한 서울 종로구 계동의 '중앙탕'이 선글라스 브랜드의 쇼룸으로 재탄생했다. 젠틀몬스터 제공
1969년 목욕탕 영업을 신고한 서울 종로구 계동의 '중앙탕'이 선글라스 브랜드의 쇼룸으로 재탄생했다. 젠틀몬스터 제공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이 선글라스 전시장으로

2014년, 기록상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으로 알려진 종로구 계동의 ‘중앙탕’이 문을 닫는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다. 머지않아 이 목욕탕이 선글라스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쇼룸으로 활용된다고 했을 때는 '동네 목욕탕과 트렌디한 선글라스가 과연 어울릴까'라며 의아해 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그로부터 3년, 젠틀몬스터의 북촌플래그십스토어는 목욕탕의 원형을 살리고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외부엔 여전히 '목욕탕'이라고 적힌 낡은 간판이 달려 있고, 내부에는 냉탕과 온탕으로 이용되던 욕조가 그대로 남아있다. 빛바랜 타일이 붙은 벽의 선반엔 선글라스가 전시돼 있다.

옛 목욕탕의 내부 모습을 살려 리모델링한 쇼룸. 젠틀몬스터 제공
옛 목욕탕의 내부 모습을 살려 리모델링한 쇼룸. 젠틀몬스터 제공

젠틀몬스터 관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느낌을 주고자 모두의 추억이 깃든 목욕탕에 선글라스를 전시하는 것을 고안하게 됐다"며 "남겨진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고, 옛 목욕탕의 모습을 살리면서 브랜드의 가치를 창출하는 '창조된 보존'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과거 '중앙탕'으로 영업할 당시 욕조와 현재 쇼룸에 남아 있는 욕조. 젠틀몬스터 제공
과거 '중앙탕'으로 영업할 당시 욕조와 현재 쇼룸에 남아 있는 욕조. 젠틀몬스터 제공

군산=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