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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여태 기다렸다, 멸치가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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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액젓은 언제나 외할머니로부터 왔다. 할머니의 액젓은 고소하고 청아했다. 미역국을 끓일 땐 늘 할머니의 액젓으로 간을 한다. 김치는 물론이거니와 나물을 무칠 때에도 액젓을 쓴다. 은근하게 깔끔한 짠맛, 그 뒤에 감도는 향긋한 단맛. 새우젓의 쌈빡함도 좋지만, 조선간장의 묵직함도 좋지만, 잘 내린 말간 멸치액젓만이 가진 청아함은 뭔가 특별한 손맛을 획득한 사람처럼 으쓱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그녀가 어떻게 만드는지 나는 모른다. 김장철 무렵, 이건 명자네 저건 명선이네 작은 건 우진이네, 하며 본인만 구분할 수 있는 각기 다른 페트병에 담은 액젓을 엄마로부터 전해 받아 쓸 뿐이었으니까. 멸치젓을 담는 게 4월인지 5월인지, 무슨 소금을 얼마나 많이 넣는지, 물을 넣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을 넣으면 끓여서 넣는지 맹물을 넣는지, 그걸 햇볕에 두는지 그늘에 두는지, 또 얼마나 두어야 딱 알맞게 삭는지. 그런데 굳이 그것까지 알 필요가 있나 싶었다. 가을이면 어차피 할머니의 액젓이 올라올 텐데. 멸치젓이야 뭐 멸치와 소금과 시간이 만드는 게 아닌가 하면서. 할머니가 더 이상 멸치액젓을 담글 수 없게 되자 당황한 건 엄마였다. 엄마 역시 엄마의 엄마가 만든 액젓을 받아먹고만 살았으니까.
멸치가 오고 있다. 기장 죽변항에는 벌써 멸치 그물 털기를 시작했다. 여태 기다렸다, 멸치가 오기를. 하지만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살이 조금 더 오르고 기름기가 더더 찰 때까지. 멸치 소식이 들려오자 엄마는 멸치젓 담글 준비를, 나는 멸치식초절임 담글 준비를 한다. 엄마나 나나 맛은 볼 줄 알지만 직접 만들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아, 약간 긴장한 상태다. 그저 어깨 너머로, 할머니의 입에서 엄마의 입으로 전해지는 말로, 배웠을 뿐이니까. 그래도 그 맛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한번 시도나 해보자 했던 작년에는 그럭저럭 흉내는 냈다 싶었으니, 올해는 뭔가 더 원래의 맛에 가깝게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는 것이다.
내가 있던 말라가는 멸치로 유명한 도시다. 말하자면 스페인의 기장 죽변항. 그래서 그곳 사람들을 일컬어 ‘멸치들’이라고도 하고 그곳 축구팀의 심볼이 멸치이기도 하다. 축구공을 차는 멸치라니. 어쨌거나 그곳은 사시사철 멸치축제다. 산란기에 기름지면 좋고 아니더라도 어찌나 크고 실하고 고소한지. 타파스 바에서부터 고급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메뉴에 멸치튀김이 빠지지 않는다. 여름이면 해변에 꼬챙이에 멸치를 예닐곱 개씩 꽂아 장작불에 구워 파는 천막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굵은 소금을 훌훌 뿌려 구운 멸치를 열 손가락 쪽쪽 빨아가며 맨손으로 먹고 있노라면, 너도 말라가 사람 다 됐구나, 친구들이 말했더랬다. 그리고 내가 말라가 사람으로 완전히 인정받았던 음식이 바로 멸치식초절임(boquerones al vinagre)이다.
멸치의 신세계. 이 상큼한 비린 맛은 어디서 오는 거냐. 갖은 양념을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식초에 절였다가 올리브유만 살짝 뿌렸을 뿐인데, 맥주든 와인이든 셰리든 뭐든, 술이라 부를 뭐든 한 모금만 가져다 주오, 그냥 봄 노래가 흘러나올 터이니, 흥얼흥얼. 입안에 내내 감도는 휘파람 소리. 살짝 구운 빵 위에 얹어 먹어도 좋고, 짭짤이 대저토마토와 함께 먹어도 좋고, 입맛 없을 때 물 만 밥에 먹어도 좋고, 참 많이도 먹었다. 그러다 보니 멸치식초절임을 보면 그냥 두 손가락으로 멸치꼬리를 잡고 통째로 꿀꺽, 흥얼흥얼. 그래 너 좀 먹을 줄 아는 구나, 말라가 사람으로 인정. 그 맛을 두고두고 기억하려고 그곳 엄마들 할머니들을 붙들고 멸치식초절임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방법과 레시피는 조금씩 달랐지만, 멸치에 대한 애정만큼은 한결같았다.
멸치를 기다리고 있다. 뼈 바를 일을 생각하면 까마득하지만, 그보다 더 아득한 건 내 할머니의 액젓.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맛과,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맛과, 흉내를 내서라도 기억하고 싶은 맛에 대해. 한동안 멸치 비린내가 진동하겠구나. 그 비린내 속에서 행복하겠구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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