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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천막봉사 4년, 상처와 치유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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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명 받는 진실마중대 이정연씨
숨진 단원고생 동갑 아둘 둔 엄마
“시체장사 그만” “보험금 노린 쇼”
비난ㆍ비아냥에 한달 5, 6번 눈물
시민 관심ㆍ봉사자 열정이 원동력
#2. 리본 만드는 신희순씨
노부부ㆍ학생 등 다양한 시민 발길
하루 평균 8000개 정도 만들어
“사람을 치유하는 건 결국 사람
진실규명때까지 추모공간 있어야”
“서명 부탁 드립니다. 아직 세월호 진상 규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퇴근시간인 10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내 ‘진실마중대’에선 자원봉사자 이정연(52)씨가 파란 불(보행신호)이 꺼질세라 발걸음을 바삐 재촉하는 시민들에게 서명을 촉구했다. 매일 이곳을 지나는 바쁜 직장인들인지라 무심코 지나치거나 서명 의사가 있더라도 이미 한 사람들이 많을 터. 그럼에도 여전히 파란 불이 켜질 때마다 적어도 시민 두세 명이 이씨 앞에 멈춰 서 서명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중년 남성의 인사에 이씨는 “힘이 난다”며 웃어 보였다.
이씨가 이곳에 처음 선 건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몇 달 뒤 여름. 세월호에 갇혀 숨진 단원고 학생들과 동갑인 아들(현재 22)을 둔 엄마로서 사건 직후부터 가슴이 먹먹했는데,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뭔가 잘못 돼 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엔 정부를 믿었는데, 갈수록 감추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진상 규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오래가지 않아 잊혀질 것 같아 거리로 나왔어요. 역시나, 같은 생각을 가진 시민이 많았어요.”
4년 가까이 봉사하다 보니, 가슴에 품은 상처도 숱하다. 생각이 다른 시민들이 봉사자는 물론 희생자와 유족을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일이 많아 한 달이면 5, 6번 눈물짓는다고 한다. “재작년까지는 ‘시체장사 그만하라’ ‘보험금 노린 쇼가 지나치다’ 같은 근거 없는 비난에, 정권교체 뒤인 지난해와 올해엔 ‘이러면 뒷돈이 얼마나 들어오느냐’ 등 비아냥이 늘었다”는 게 이씨 얘기. 그는 “서명지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적고 발길을 돌리는 사람도 꽤 있다”고 했다. 이날도 진실마중대 앞엔 한 70대 남성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손에 들고, 서명하는 여중생들을 향해 거친 말을 쏟아냈다. “어린것들이 뭘 안다고 서명해, 다 북한으로 가버려!”
그럼에도 직장을 다니면서 4년째 봉사를 이어갈 수 있는 건 사건 진상 규명에 대한 간절함과 시민의 관심, 그리고 동료 봉사자들의 한결 같은 열정 덕이라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그와 함께 진실마중대를 지키는 자원봉사자는 약 25명. 대부분 자녀를 둔 주부와 여성 직장인들로 각자에게 허락된 시간(평균 일주일 2회) 이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한다. 진실마중대가 열리는 낮 12시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봉사자들이 이 곳을 지켜주면, 3시쯤엔 중고등학교 자녀를 둔 봉사자들이 교대해주고, 이후엔 직장인이나 대학생 자녀를 둔 봉사자들이 이곳을 지키는 식이다. 보험심사 간호사로 일하는 이씨는 보통 오후 3시에 퇴근해, 4, 5시쯤부터 8시 정도까지 이곳을 지킨다.
그 시각 또 다른 천막(노란리본공작소)에선 시민 10여명이 빼곡히 들어앉아 세월호 추모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공작소는 시민후원금으로 마련된 재료를 가지고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리본을 완성하는 공간이다. 4년째 이곳에서 리본을 만들고 있다는 주부 신희순(59)씨부터 “다른 학생들에게 나눠 줄 리본을 직접 만들기 위해 처음 왔다”는 여대생까지 세대도 다양했다. 요즘도 이곳을 찾은 시민들 손에서 하루 평균 8,000개 정도의 리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신씨는 4년간 이곳서 만난 시민 덕에 ‘사람을 치유하는 건 결국 사람’이란 생각을 새삼 다시 새겼다고 했다. “가족·친구·연인 단위로, 혹은 혼자서 이곳에 들어와 리본을 만들고 간 사람들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지난해 말 “이제 찾아와 너무 미안하다”고 펑펑 울다 후원금 5만원을 내 놓고 떠났다는 강원 산골서 왔다는 노부부, 지난달 경기 연천군에서부터 직업군인 아버지 손을 붙잡고 와 군말 없이 두 시간을 만들고 갔다는 여섯 살, 열 살짜리 고사리 손 아이들까지, 이곳 봉사자들에겐 모두 동료이자 가족이라고 한다. 그는 “수학여행을 가다 참변 당한 학생들을 기억하자며 이곳을 찾는 학생들을 볼 때면 고마움이 크다”라며 접착제가 덕지덕지 붙은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어루만졌다.
이곳 봉사자들은 매년 ‘그날(4월 16일)’이 가까워지면 항상 가슴이 쓰리다고 한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채 한 해를 넘겨온 게 어느덧 4주기째. 충격(사건발생)의 1주기, 절망(지지부진한 수습 및 인양계획)의 2주기, 희망(촛불집회와 정권교체)의 3주기를 거쳤다는 이들은 다가오는 16일을 “걱정의 4주기”라고 말하며 쓰게 웃었다.
“4주기를 기점으로 안산 분향소가 문을 닫아요. 광화문이 사실상 유일한 분향소가 되는데, 이 또한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실정입니다.” 이씨는 광화문 천막 철거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끼면서도, “진상 규명 때까지 기억하고 추모할 공간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얘기가 오가던 천막 한 편에 앉아있던 유가족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늘진 얼굴로 자리를 떴다.
글·사진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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