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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갓 지은 쌀밥처럼... 파에야도 그래야 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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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던 손님이 주방장을 부른다. 무언가 밥이 될 만한 것이 있느냐 묻는다. 밥이 될 만한 것, 글쎄요, 버섯과 새우가 들어 있는 이 계란요리는 양이 넉넉해서 괜찮을 듯하고, 꽃갈비살이나 항정살을 구운 과일과 함께 드시면 든든할 것 같고, 아니면 국물이 있는 조개 술찜이나. 그런 거 말고 면이나 쌀이 들어간 요리는 없소? 리조토나 파스타 같은 거 말이요. 빠에야가 쌀요리이기는 한데 4인분 이상에 하루 전 예약이라. 다른 데는 1인분씩 주문하는 대로 되던데 여기는 왜 안 되오? 제가 아직 10분만에 빠에야 만드는 법을 못 배워서, 죄송합니다. 밥 될 만한 것이 없는 식당에 발을 들인 손님이나, 밥 될 만한 것이라 여기고 메뉴를 만든 주방장이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그 마음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이 아니다.
나야말로 소문난 밥보였다. 밥알이 들어가지 않으면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던 사람이다. 특A++ 한우가 앞에 있어도 밥과 함께 먹어야 했다. 쌀눈이 말갛게 비치는 하얀 쌀밥에 고기의 육즙이 스며들 때, 입안에 그것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고기 맛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법이니. 국물이 있건 없건, 맵든 달든 짜든, 딱딱하건 보드랍건 무르건, 그 무엇이든 맛의 표정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밥. 오로지 밥. 맨밥에 곰삭은 조개젓만 있어도 풍성한 식탁이었다. 그래서 물 건너 오랜 여행을 하다 돌아오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엄마의 흰 쌀밥인 것은 당연했다. 밍밍하다 싶을 만큼 단순한 밥맛이, 화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흰 쌀밥의 맛이, 어쩌면 그리도 집요하게 그리웠던지. 오래 기다려온 연인의 몸 한 끝에 손을 댄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연인의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갈 사람처럼, 밥을 떠 넣는 숟가락질은 조심스럽게 성급했더랬다.
쌀밥이 그립기도 했지만, 사실은 엄마의 밥 짓는 소리가 그리웠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매끼 새로 압력솥에 밥을 지어 상을 차렸다. 치그작치그작 압력밥솥 방울소리. 불을 끄고 뜸이 드는 동안 조금씩 잦아들다가 이윽고 치익 압력 빠지는 소리. 그것은 어여 식탁에 와 앉으라는 소리. 밥 뚜껑을 여는 순간의 행복. 김을 쐬며 주걱으로 밥알을 고루 저어주는 일. 엄마는 주걱의 끝이 집 안쪽으로 향하도록 해서 퍼야 복이 달아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주걱을 제대로 세워 저어주는 일도, 밥그릇 가장자리에 밥알이 묻지 않도록 예쁘게 담는 일도 무척 어렵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밥상 차리는 일에 손을 보태더라도 밥을 푸는 일만큼은 엄마 몫이었다. 그렇게 받아 든 한 그릇의 밥. 구수하고 달큰한 밥 냄새가 참으로 향긋하게 아릿했다.
밥 짓는 소리를 들은 지가 언제였더라. 고백하자면 요즘엔 즉석밥을 주로 먹고 산다. 식당을 하면서 즉석밥이라니 혀를 찰 일이지만, 오픈 시간 전후로 틈을 내서 먹는 끼니라 어쩔 수가 없다. 밥을 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데워먹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치그작치그작 소리내며 지어낸 밥을 고슬고슬 바로 퍼서 먹을 게 아니라면, 즉석밥이나 냉동밥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하는 변명 비슷한 체념을 가지고 있다. 모가 아니면 도다.
밥 될 만한, 혹은 쌀알이 들어간 메뉴를 찾던 손님은 다음에 예약을 하고 오겠노라며 문을 나섰다. 실은 나도 알고 있다. 미리 만들어두었다가 살짝 누룽지가 생기도록 구워내는 빠에야 만들기 방법을. 그런데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게 된다. 빠에야는 반드시 대형판에 그득하게, 꼬박 40여분을 불판에 붙어 서서 타지 않게 돌려가며 만들어 내야 한다고. 한참 바쁠 때 빠에야를 하고 나면, 이 메뉴 빼버려야지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몸살을 앓지만, 즉석밥을 먹고 있는 주방장이지만, 어쩌겠는가, 빠에야는 그래야 하는 걸. 아무래도 오늘은 주방을 위한 압력솥밥을 지어 먹어야겠다. 치그작치그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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