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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식탁] 씨앗 색깔처럼 추억을 소환하는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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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새똥 천지다. 차를 세워둔 곳이 하필이면 새들의 이동경로였는지, 아니면 새들이 내 차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작당들을 한 것인지, 앞 유리며 보닛이며 참 골고루도 싸질러놨다. 검은 캔버스에 그린 유화그림 같다. 흰색 물감에 보라와 빨강을 보태 거칠게 흩뿌린 방식의 유화. 더럽게 기분 나쁜 공격이지만, 그나마 고운 색에 허허 웃음만 나온다. 그래 니들이 뭘 먹었는지 알고도 남음이다. 따먹지 않고서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어여쁜 열매들이니, 나 또한 손과 입술에 보라 물을 들이며 신나게 따 먹었으니, 먹고 싼 것을 뭐라 할 수 있나. 앉아서도 싸고 날면서도 싸는 게 새들의 일. 그나저나 같은 것을 먹었으니 내 똥도 니들과 같은 색이려나.
앵두 버찌 오디 보리수. 보는 것만으로도 피가 도는 붉은 열매들. 제일 먼저 손이 간 것은 앵두였다. 아직 푸른 기가 도는 것이 더 많아, 잘 익은 앵두를 찾는데 애간장이 탔다. 그래서 더 감질나게 달았다. 앵두를 입에 넣으며 어릴 적 앵두나무집 예쁜 언니를 떠올렸다. 동네에서 제일 높은 담장과 제일 넓은 마당에, 수많은 과실나무와 꽃나무를 가진 그 집. 메리야스 바람으로 동네를 뛰놀던 예닐곱 살의 선머슴 같은 계집애를 집으로 불러들여, 앵두 몇 알을 따 손바닥에 올려주던 참으로 예뻤던 그 언니. 앵두처럼 예쁜 언니였는지, 언니처럼 예쁜 앵두였는지는 몰라도, 앵두는 부잣집 예쁜 언니의 열매, 그 열매를 손에 받은 나도 부잣집 예쁜 아이, 앵두를 손에 받아든 순간 우리가 어쩐지 비밀스러운 동맹 같은 걸 맺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먹고 남은 앵두 씨를 깨끗이 씻어 내 보물상자 속에 넣어 두었더랬다. 내가 크면 분명 앵두나무집 언니처럼 예쁜 여자가 되어 있을 거라 믿으면서. 어쨌거나 지금 우리 집에는 앵두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앵두나무집 언니가 될 수 있겠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마당으로 끌고 들어와 앵두 몇 알 올려줄 선머슴 같은 계집애도 지나가지 않고, 그래 봐야 예쁜 언니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으니, 잘 익은 앵두를 찾는 족족 입으로 가져가 쪽 빨고 툭툭 혀를 모아 씨를 뱉어내기 바빴다. 앵두를 먹는 것보다 씨 뱉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음은 오디였다. 뽕나무열매. 붉은 기가 남아 있는 열매가 더 예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완전히 새카맣게 익어야 더 달고 향기롭다. 발라낼 씨도 없으니 따는 족족 입에 넣고 씹어 넘겼다. 손톱 밑이며 입술이며 혓바닥이며 이가 온통 검은 색이 되는 것도 모르고 따고 담고 먹다 보니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디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배추벌레, 뽕 잎 먹는 누에를 닮았다. 뽕나무는 왜 벌레처럼 생긴 열매를 만든 걸까. 누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이미 여기는 다른 벌레들이 와 있으니 오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벌레라면 새들이 입맛을 다시고 달려들 텐데. 아, 그래야 뽕나무 씨가 새들의 똥에 섞여 널리널리 퍼져나가려나? 뽕나무의 전략을 미처 다 알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오디를 오물오물 많이도 따 먹은 나는, 뽕잎 먹은 누에처럼 살이 통통하게 오를 것 같았다.
오디로 배를 채운 다음 보리수와 버찌를 따 먹었다. 버찌는 내가 직접 따 먹지 않고 일부러 아버지에게 따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건 몰라도 버찌만큼은 아버지가 따 주어야만 버찌 맛이 나니까. 어릴적 이맘때 나들이를 가면 아버지는 어디선가 꼭 벚나무를 찾아내 버찌를 따서 입에 넣어주곤 했었으니까. 오래 전 바로 그 맛이 났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아버지가 따 건네주던 버찌의 맛. 버찌까지 먹고 나자 날이 졌다. 붉은 열매들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쌀 똥의 색깔을 떠올려보았다. 아마도 열매의 색깔이 아니라 씨앗의 색깔을 띨 것 같았다. 앵두와 오디와 버찌 속에 숨은 추억의 씨. 내가 탄 차 위에 그려진 새똥그림보다 훨씬 멋진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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