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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하는 사람에게 투표권 위임… “대의 민주주의 한계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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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리퀴드 민주주의’
“블록체인 기술이 게임 체인저 역할”
조작 불가능한 모바일 투표 통해
지역구 의원 민심 반영 직접 평가
ICT 전문가 많아 블록체인 발달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 성지로
내가 뽑은 정치인이 내 의사를 얼마나 잘 대변하고 있을까. ‘대의 민주주의’가 태동한 이래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실험이 세계 곳곳에서 한창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지역구로 하는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낸시 팰로시 의원은 지난 6월 5일 치러진 예비선거 직전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간 지역 유권자들의 의사를 얼마나 잘 대변했는지를 나타내는 평가에서 ‘B+’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팰로시 의원은 지난해 1월 원 구성 이후 이뤄진 332건의 법안 투표에서 39차례 지역구 주민들의 의사를 배반하는 쪽에 표를 던진 것으로 집계됐다. 민의를 대변하겠다던 당초 약속을 10번 중 한 번 꼴로 어긴 것이니 선거에서 유권자의 심판을 받게 될지 두려웠던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배경에는 ‘리퀴드 민주주의’(Liquid Democracy)라는 새로운 민주주의 운동이 있다. 리퀴드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비유하는 고체(固體)와 대비해 이름 붙여졌다. 유권자가 4, 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때만 주권을 행사하고 다음 선거가 있기 전까지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체와 같이 유연하지 못한 대의 민주주의와 달리 액체처럼 유동적인 민주주의라는 뜻으로 관련 정치 운동을 아우르는 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리퀴드 민주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개발된 시스템이 바로 ‘유나이티드 보트’다. 상ㆍ하원 의원들의 법안 투표 결과와 해당 법안에 대한 지역구 유권자들의 의사를 비교해 점수화하는 것인데, 유권자들의 의사를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 투표를 활용해 확인한 것이 특징이다. 팰로시 의원의 성적표도 이 시스템에 의해 산출됐다.
유나이티드 보트를 개발한 데이빗 어니스트(26)는 “기성 정치인의 입법 투표가 민심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를 보여줄 목적으로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들과 2년간 협업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며 “유나이티드 보트가 정착되면 정치인이 자신이 아닌 유권자의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에 보다 충실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 역시 리퀴드 민주주의의 정신을 내걸고 후보로 나선 캘리포니아주 주하원 19지구 예비선거에서 3.5%(3,099표)의 득표율을 얻었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투표권 위임 허용해 대의성 극대화”
리퀴드 민주주의의 또 다른 핵심은 자신의 투표권을 신뢰하는 다른 유권자에게 위임하거나 반대로 넘겨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지금처럼 유권자 한 명이 한 표를 행사한다는 사실은 변함 없다. 정해진 후보에게 직접 투표하는 게 내키지 않는 유권자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투표권을 위임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 표와 자신이 가진 표를 합쳐 투표할 수 있다는 게 차이점이다. 선거가 여러 단계의 투표를 거쳐 치러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인이 50표, 100표도 행사할 수 있고 투표권을 많이 위임 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후보자가 결정된다. 이론적으로는 위임 받은 표가 전체 유권자의 50%를 넘는다면 선거 없이도 바로 그 사람이 대표자로 결정되는 셈이다. 투표권을 위임하게 되면 후보자 선정에서부터 민의가 반영되기 때문에 민주주의 정신에 더 가까운 선거제도가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번 예비선거에서 리퀴드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주하원 15지구(오클랜드)에 출마한 세르게이 피터만(25)은 “정치인이라지만 생면부지인 사람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내 정치적 의사를 더 충실히 대변할 수 있다”며 “이런 방식은 주어진 후보만 선택할 수 있는 수동적 상태를 벗어나 스스로 대의자를 선택할 수 있는 능동적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블록체인 기술, 조작 불가능한 일상적 투표 가능
리퀴드 민주주의는 2000년대 초 인터넷 붐이 일었을 때 현실 정치에 처음 등장했다. 2007년 돌풍을 일으킨 독일 해적당이 도입했던 당내 의사 결정 시스템 ‘리퀴드 피드백’이 그것이다. 당원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대의 아래 정당의 주요 안건을 전 당원이 직접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지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탓에 곧 한계에 부딪혔다. 익명성 논란이 불거졌고, 결정적으로 온라인 투표 조작을 막을 수 없어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이 리퀴드 민주주의에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중앙집중형 서버에 기록을 보관하지 않고 수많은 컴퓨터에 동시에 데이터를 분산 저장하고 데이터와 데이터가 체인(사슬)으로 엮여 있어 특정인이나 집단에 의해 수정ㆍ삭제가 불가능하다. 어니스트는 “각각의 투표는 블록화해 서로 체인화하고 그 과정은 모두 분산원장(元帳)에 올라가게 된다”며 “블록체인 기술로 투명성은 물론 유권자가 자신의 의사대로 투표가 됐는지 언제든지 검증할 수 있어 신뢰를 담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리콘밸리를 품은 샌프란시스코가 리퀴드 민주주의의 성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블록체인 기술의 융합을 이끌어낼 정보통신(ICT) 전문가들이 있었다. 어니스트는 최근까지 인공지능(AI) 기술을 토대로 한 스타트업 기업 뉴머라이의 최고기술책임자(CTO)였고, 피터만 역시 아웃코(OutCo)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피터만은 “기성 정치권은 머신러닝이나 AI기술을 적용한 마이크로타겟팅까지 시도하며 사실상 유권자를 지배하려 들고 있는데, 유권자는 여전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며 “리퀴드 민주주의는 유권자와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하나의 방패”라고 비유했다.
정치 참여 확대, 풀뿌리 민주주의 강화 기대
이들은 리퀴드 민주주의 운동이 유권자들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예비선거에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레이첼 레이브먼씨는 “‘내 한 표가 무슨 힘이 있어’라는 생각에 구석에 처박아둔 투표권을 리퀴드 민주주의가 다시 꺼내 들게 했다”며 “마치 공유 경제처럼 투표권을 한데 모아 공유하면 정치인들이 유권자의 신념에 따라 의회에서 투표할 수 있겠다는 상상에 힘을 느꼈다”고 전했다.
거대 양당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책임 정치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슈퍼팩(한도 없이 정치 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특별정치활동위원회)으로 상징되는 금권 정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다는 이점도 있다. 복잡계 과학 연구를 위해 설립된 산타페연구소(SFI) 회장을 역임한 짐 러츠 박사는 “블루와 레드 두 팀으로 나눠 벌이는 승자독식 정치 게임의 역기능을 해결할 최고의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어니스트는 “좀 더 책임성을 높이는 정부, 대의성을 확대하는 정치가 돼야 더 나은 사회가 된다”며 “이를 위해서는 블록체인이라는 게임 체인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샌프란시스코=글ㆍ사진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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