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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미스터 션샤인이 일깨운 ‘비운의 군주’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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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수로 따지자면 선대 왕인 철종과 자그마치 ‘17촌’,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만 빼고 보면 태생은 범상했다. 아명(兒名)은 ‘개똥이’. 저잣거리를 굴러다니는 가장 흔한 이름으로 불리던 그는 열두 살의 나이로 왕좌에 오르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생’을 살게 된다. 500년 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왕이 아닌, 살아있는 아버지’를 두었던 이 군주는 끊임없이 왕의 권력을 탐했던 아버지와 평생 갈등했다. 그리고 사방이 적들로 가득한, 어지러운 시대의 동반자였던 아내를 적국의 칼에 처참하게 잃었다. 그래서였을까. 후대의 기억 속에서 그의 존재감은 늘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 어디쯤을 불안하게 맴돌고 있다. 조선의 26대 왕이자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를 ‘아버지와 아내의 그늘에서 우왕좌왕하다 나라를 잃고 만 무능한 군주’로 기억하는 이유다.
흔히 망국의 시대라 여겨지는 구한말은 그간 사극은커녕 국사 연구에서조차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먼지 낀 역사였다. 그 어두웠던 시기가 드라마 한 편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큰 인기를 끌면서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고종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줏대 없이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 바빴던 ‘유약한 왕’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침략에 안간힘을 다해 버텼던 그저 ‘불운한 왕’이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아닌 실제 역사 속에서의 고종은 어땠을까. 그는 정말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 ‘무능한 군주’였을까, 격변의 시대를 만난 ‘비운의 군주’였을까.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만들어야만 했던 일제
고종을 어리석은 군주로 둔갑시킨 주체는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명분 없는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망국 책임론, 즉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야만의 나라였기 때문에 스스로 망한 것’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실시한 광무개혁의 결과들이 한없이 축소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개혁은 1905년 러일전쟁을 이긴 일본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면서 좌초됐고, 그나마의 성과들은 친일 인사들의 공으로 둔갑했다. 뿐만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그들은 ‘고종은 나라를 망하게 한 유약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시작한다. 한반도는 ‘미개한 땅’이어야만 했고, 그 땅의 군주는 반드시 무능해야만 했다. 조선의 식민지화가 ‘불법강점’이 되지 않으려면.
그러나 하나의 이미지로 덧씌우기에 재위 44년은 긴 시간이었다. 우유부단해서 나라를 잃었다는 인색한 평가에 가려진 고종의 다른 면모가 뒤늦게 조명되는 이유다. 고종은 아버지와 달랐다. 당대 일본 학자 사이에서도 ‘새로운 문물을 살피는 데 있어서 만큼은 조선왕조 역대 어느 왕보다 뛰어났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 그는 수명을 다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시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국가를 세우려 했다. 함규진 서울교육대 교수에 따르면 고종이 쇄국정책을 펴 온 대원군에 반기를 들고 ‘왕의 아버지’가 아닌 ‘왕’ 중심의 권력 체계를 다시 세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알려진 대로 유약하기만 한 군주였다면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적민(積民)이 곧 국(國)이다”(백성이 쌓여야 나라다)는 그의 말마따나 고종은 나라를 지칭할 때 ‘국가(國家)’ 대신 ‘민국(民國)’을 사용했다. 왕조국가가 아닌 근대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가가 아닌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주권을 잃지 않고 바로 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청나라가 내정에 간섭해 오던 1880년대 중반, 고종은 청의 감시를 피해 근대화에 필요한 정보가 담긴 외국 서적들을 몰래 들여오기 시작한다. 상하이에서 들여온 책들이 자그마치 3만 여권. 이때 부지런히 배우고 익힌 지식들은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빛을 발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모델로 삼은 도로체계를 만들고, 황제의 본궁을 도심 중앙에 위치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옮긴 것은 물론, 전차가 달리는 철길 옆으로 탑골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이 언제든 자유롭게 모여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게다가 1899년 서울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 전차는 도쿄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경복궁에만 들어왔던 전기가 서울 전역의 밤을 밝히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그저 ‘도읍’에 불과했던 한양이 근대국가의 ‘수도’로 거듭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황제가 개인 돈인 내탕금까지 선뜻 내놓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조금 늦었을지언정,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외국어를 익혀라, 그게 대한제국의 힘이다
고종은 선교사들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비단 선교사뿐이 아니었다.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외교관, 심지어는 상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반도 전체가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 돼 버린 상황 속에서 황제는 나라의 생존을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외교뿐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어는 물론, 해외 문물에 능통한 젊은 외교관들을 양성하기 위해선 ‘원어민 교사’가 필요했다. 황제의 거처인 경운궁 코앞에 ‘정동 주한 외교공간’이 생긴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이곳 정동엔 황제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수십, 수백 명의 외국 사절과 해외파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황제의 눈에 든 이들은 곧 예비 외교관들을 가르치는 ‘진짜 선생님’이 됐다. 고종에게 서양문물을 직접 배워올 수 있는 외국어 능력이란 곧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1899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독일의 하인리히 왕자가 “내 나라 독일과 이토록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왜 이리도 독일어를 열심히 익히는가”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외교 아카데미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헤이그에 파견됐던 3인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모두 5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 능력자들이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경제력, 군사력, 국력 중 그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던 대한제국은 과연 외교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황제의 최종 목표는 스위스나 덴마크와 같은 ‘중립국’이 되는 것이었지만, 실상 힘없는 나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열강은 없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이 먼저 나서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국외중립 선언을 발표하지만 철저히 무산된 것. 1907년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로 파견한 헤이그 특사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방해와 서구 열강들의 방관으로 회의장에 들어서지조차 못했던 이들은 황제의 친서를 품고 그대로 돌아서야만 했다. 이미 반세기 이상 뒤처져 버린 개화의 격차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고종의 첩보원들
외교 무대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이들은 황제를 위한 비밀 첩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하는데 이들이 바로 ‘제국 익문사’다. 황제가 소수의 정예요원을 직접 임명해 관리하는 일종의 정보조직이었다. ‘제국익문사비보장정’(1902)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황제의 외교문서를 운반하기도 하고, 해외 주요국들을 돌며 현지의 동향과 정세를 몰래 파악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아직까지 어떤 인물들이 익문사 요원이었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 정도로 이들의 보고 라인과 암호 체계의 보안성은 뛰어났다.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이었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 열사 또한 바로 익문사 요원이었다. 1909년 중국 상하이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 배후에도 익문사들이 있었다는 설은 상당히 유력하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 오오시마가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에게 보낸 탐문 보고서(1910)에 따르면 체포된 안중근을 구출하기 위해 고종이 보낸 두 명의 밀사가 그를 러시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황제 자신은 비록 일본의 감시에 묶인 몸이었을지언정, 그가 보낸 사람들은 세계를 누비며 황제의 손과 발, 입과 무기를 대신한 셈이다.
고종이 구체적인 용도를 밝히지 않고 익문사 예산으로 끌어들인 돈은 나라가 유사시에 빠질 때를 대비한 비자금이 되기도 했다. 자금을 관리한 것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이었다고 전한다. 이증복의 ‘한국야담사화’(1960)에 따르면 고종과 여러 차례 만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모의했던 그는 훗날 이 비자금의 일부를 받아 상하이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파리강화회의 밀사 파견 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비자금 대부분은 당시 주한 독일 공사였던 콘라드 폰 잘데른의 손을 거쳐 독일 은행에 예치됐는데, 그 액수가 100만 마르크(현재 가치 500억 원)를 넘었다. 1908년 당시 비자금의 행방을 찾던 일본이 독일 정부에 확인 요청을 보내자 고종의 사람이었던 잘데른 공사는 기지를 발휘한다. “절반은 보내고, 절반만큼은 확보했으면 한다. 그 돈을 황제가 보내는 정당한 사절에게 주기를 한국인들도 원할 것이다.”(1907년 2월 5일 잘데른이 뮐베르크 외교부 차관에게 보낸 보고서) 독일 정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종의 명령서를 위조한 일본 측에 예치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51만 8800마르크만을 돌려주었다. 나머지 절반은 아직까지 독일 도이치뱅크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국가 ‘대한민국’이 멀지 않았지만…
단식까지 불사하며 퇴위를 거부했던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 당한다.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은 궁궐의 내시 2명을 데려와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 ‘강제 양위식’을 거행했다. 마지막 군주인 순종이 즉위하고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은 일본과 병합된다. 주권을 빼앗기고, 왕위를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도했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주와 독립’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19년 1월 21일, 한일병합 9년 만에 고종 황제는 사망한다. 명백한 독살 정황을 전해 들은 국민들은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황제가 만든 탑골공원에서, 황제의 궁궐이었던 경운궁 대안문(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그들은 식민지 백성이 아닌 이미 망해버린 ‘대한제국의 국민’으로 만세를 외쳤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에 벌어진 3ㆍ1 만세 운동이다.
상해 임시정부의 국호는 고종이 직접 지은 이름 ‘대한제국’과 그가 나라를 일컬어 자주 썼다는 단어 ‘민국’을 합해 만들었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격랑의 시대를 만나 그저 ‘불운했던 군주’ 고종이 꿈꿨던 근대 국가의 꿈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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