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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평보다 제주…10월 한라산 중턱은 새하얀 메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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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제주 들녘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처럼 하얀 메밀꽃으로 장관을 연출한다. 메밀이라 하면 으레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인 평창 봉평을 연상하지만 사실 국내 최대의 메밀 재배지는 제주도다. 생산량 또한 제주도가 가장 많다.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메밀 재배면적은 2,272헥타르(ha)인데 제주가 845ha로 전체의 37%을 차지하고, 전남 337ha, 경북 292ha, 전북 220ha, 강원 215ha이 뒤를 잇고 있다. 생산량 또한 전체 1,683톤 중 제주가 321톤으로 19%를 차지한다. 이어 전남 283톤, 강원 226톤, 전북 220톤, 경북 219톤 순이다.
제주의 메밀 재배 역사는 멀리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탐라를 점령한 몽골이 메밀에 사람의 피를 말리는 독성이 있음을 알고, 삼별초 항쟁을 도운 제주 사람들을 골려 주려고 메밀을 도입했는데 제주 사람들이 독성을 제거하는 무를 함께 먹음으로써 피해를 예방했다는 설이다.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밭벼, 기장, 피, 보리와 함께 메밀이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제주의 신화에도 메밀이 등장한다. 농경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경본풀이’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옥황상제의 아들 문곡성과 결혼한 자청비가 하늘나라에서 전란을 평정한 후 농경의 신인 세경할망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올 때 오곡과 함께 메밀 씨앗을 가져온다. 그런데 뒤늦게 메밀 씨앗을 빠뜨린 것을 확인하고 다시 갔다오는 바람에 메밀은 다른 작물에 비해 파종 시기가 늦어졌다는 이야기다. 사소한 차이까지 이야기로 풀어내는 제주 사람들의 상상력이 빛나는 대목이다.
메밀은 건조한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생육 기간도 3개월로 짧아 이모작까지 가능하다. 때문에 제주의 척박한 화산회토 환경에 알맞은 품종으로 평가받는다. 제주도에서 메밀 재배가 성행한 것도 이러한 이유로 풀이된다. 특히 여름 작물인 조가 홍수나 가뭄으로 수확할 수 없게 되면 대체작물로 메밀이 인기를 끌어왔다.
저지대부터 중산간 일대까지 제주 전역에서 재배되기에 지역에 따라 명칭도 약간씩 차이가 나 ‘모멀’ ‘모믈’ ‘모ᄆᆞᆯ’ 등으로 불린다. 중산간 지역의 경우 개간한 밭에 파종해도 잘 자라기 때문에 중요한 식량 자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요즘에는 중산간 일대에 대규모로 재배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며 관광 자원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매년 10월 메밀꽃축제를 여는 제주시 오라동을 비롯해 메밀마을로 지정된 조천읍 와흘마을, 제주메밀체험관이 있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마을, 보롬왓 제주메밀축제를 여는 표선면 성읍리 등이 대표적이다.
생산량이 많다 보니 메밀을 이용한 음식도 발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빙떡’이다. 뒤집은 솥뚜껑에 돼지비계를 바른 후 메밀가루 반죽을 지져 전을 만들고 삶은 무채를 넣어 말아서 먹는다. 또 ‘꿩메밀칼국수’가 있는데 꿩고기와 메밀칼국수, 무를 넣어 끓인다. 메밀 요리에는 항시 무가 함께 하는데, 무가 메밀의 독성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메밀의 활용은 음식문화뿐만 아니다. 제주에서는 예로부터 베개를 만들 때 안에 탈곡한 메밀 쭉정이를 넣는다. 솜 베개는 땀이 차고 열을 발산하는데 반해 메밀 쭉정이로 만든 베개는 시원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인기를 끌어 왔다. 어쩌면 솜이 귀하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메밀이 더 많이 활용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국내 최대 메밀 생산지로 농경 문화의 한 축을 이어온 제주지만, 요즘은 대규모 재배단지를 관광자원화한 것 외에 달리 활용하는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비근한 예로 메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찾아보기 힘들다. 곳곳에서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농민의 수익을 올리겠다며 6차 산업으로서의 농업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은 구호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적어도 제주 메밀에 있어서는 그렇다.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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