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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용 마스크 쓰고 17시간 헉헉… 야외노동자 미세먼지 직격탄

입력
2019.01.15 17:44
수정
2019.01.16 00:21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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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ㆍ택배 기사 개인사업자 분류… “알아서 구입” 안전 무방비

보호구ㆍ작업 중단 등 조치 안 해도 사업주 처벌은 ‘권고’ 느슨

[저작권 한국일보]택배기사인 박헌학(64)씨가 미세먼지주의보가 발령된 15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서 방한 마스크만 쓴 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저작권 한국일보]택배기사인 박헌학(64)씨가 미세먼지주의보가 발령된 15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거리에서 방한 마스크만 쓴 채 작업을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미세먼지용 마스크요? 안 써요. 안경에 습기가 차는데다 통화할 일도 많아 작업에 방해가 되거든요.”

소리 없는 재해로 불리는 미세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15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의 대로변. 21년차 택배기사인 박헌학(63)씨는 한쪽 도로 가에 택배 트럭을 세워둔 채 한창 분류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전날부터 서울에 초미세먼지(PM2.5)경보(150㎍/㎥ 이상)와 미세먼지(PM10)주의보(150㎍/㎥ 이상)가 발동됐지만 박씨의 호흡기를 가리고 있는 건 코 닿는 곳이 뻥 뚫린 마스크, 그것도 미세먼지에는 별 효과 없다는 방한용 마스크뿐이었다. 박씨가 하루 중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은 17시간 정도. 때론 숨이 헉헉댈 정도로 고된 일이지만 미세먼지용 마스크는 관심 밖이다. 회사측도 무심하긴 매한가지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는 회사에서 마스크를 50장씩 지급했었는데,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 준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는 게 박씨 얘기다.

[저작권 한국일보]미세먼지주의보ㆍ경보에 따른 야외노동자 보호 조치 가이드라인_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미세먼지주의보ㆍ경보에 따른 야외노동자 보호 조치 가이드라인_김경진기자

연일 고농도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면서, 야외 노동자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피해를 체감하기 쉽지 않고, 자연발생적인 환경 오염 문제라 고용주에게 직접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방치되고 있다.

건설현장처럼 미세먼지 외에도 분진이 많이 발생하는 곳은 그나마 낫다. 사업주가 노동자들에게 방진용 마스크를 보급해서다. 하지만 작업시간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는 데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본보가 이날 서울 마포구의 한 건설현장을 찾아보니, 야외 작업자 중 3분의 2는 방진용 마스크를 벗은 상태였다. 작업자 나민형(57ㆍ가명)씨는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하면 숨이 가빠서 마스크를 계속 쓰기가 어렵다”며 “마스크를 써도 최근 3일간은 기침이 하루 종일 날 정도로 미세먼지가 심했다”고 토로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건설현장에 보급된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하고 있는 나민형(57)씨. 정준기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건설현장에 보급된 마스크를 쓰고 작업을 하고 있는 나민형(57)씨. 정준기 기자

배달ㆍ퀵서비스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개인 사업자 격이어서 아예 방치된 상태다. 배달서비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일감을 수주한다는 성민호(34)씨는 “대형 배달대행업체의 경우 배달 건당 300~500원씩 미세먼지 할증을 해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런 수당이 없다”면서 “마스크는 개인적으로 알아서 구입하는 게 보통”이라고 귀띔했다. 하루 200㎞ 이상을 운행한다는 퀵서비스 기사 김영모(55ㆍ가명)씨도 “기사를 위한 특별한 조치가 없어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면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사업주가 호흡용 보호구를 지급해야 하는 조건에 미세먼지를 포함시키고 지난 7일 ‘옥외작업자 미세먼지 대응 건강보호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미세먼지주의보ㆍ경보에 따른 사업주 조치 사항을 단계적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안 지켜도 그만인 권고사항이 대부분인데다 적발도 쉽지 않다. 고용부 관계자는 “미세먼지 경보가 발생한 그 때 단속해야 하는데 경보 발령은 1년에 며칠 정도라 사실상 적발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느슨한 가이드라인 대신 맞춤형 대처법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대표는 “모든 야외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면 과잉 대응 논란이 일 수 있으니 교통경찰, 톨게이트 근로자 등 미세먼지 고위험군을 선별해 보호 조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5일 오후 차가운 북서풍이 유입되면서 미세먼지 농도는 차츰 내려가기 시작했다. 장임석 국립환경과학원 대기질예보센터장은 “국외 미세먼지가 유입되면서 17일부터 미세먼지 농도가 다시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고은경 기자 scoopk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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