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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생태!] 토양은 종자은행… 연못가 진흙 세 숟가락서 537개 식물 싹 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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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메, 이 눔의 풀은 심지도 안헌디 계속 난댜?”
손바닥만 한 밭을 일구는 아버지가 봄부터 잡초를 뽑으며 노상 하시는 말씀입니다. 밭주인은 이 잡초가 밭에서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파종하였거나 모종을 심었을리 없는데요. 잡초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자라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자리를 선택하고 이동할 수도 없는데, 이 잡초는 어떻게 밭주인 ‘몰래’ 들어왔을까요? 수시로 밭을 관리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울타리를 넘으려면 은밀한 방법이었어야 하는데요, 이는 바로 씨앗이기에 가능했습니다.
어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몰래, 어떤 씨앗은 밖으로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강아지와 오누이가 산책을 다니는 사이 몸에 찰싹 붙어서 몰래, 또 어떤 씨앗은 오래 전부터 흙 속에 몰래 밭으로 들어왔고, 이를 흙이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씨앗은 맨눈으로 보기에 크기가 작고, 흙에 떨어지면 티가 나지 않는 색을 띠고 있어, 언제, 어떻게 밭으로 들어왔는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싹이 나고, 꽃대를 올릴 때에야 비로소 잡초임을 알 수 있으니 참으로 성공적인 침입을 위한 ‘은밀한 작전’입니다.
◇보이는 식물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숲이나 잔디밭에서 보는 식물 모임을 ‘식생’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식생(때로는 현존 식생이라고도 함)은 지표면 밖으로 표출된 ‘지상부 식생’을 의미합니다. 지상부 식생이 수명을 다하거나, 병들거나 다쳐서 쇠약해지면 땅 속에서는 재빨리 다음 세대를 표출시켜 식생을 유지합니다. 이렇게 표출되지 않은 채로 토양 속에 남아있는 다양한 식물 형태를 ‘잠재 식생’이라고 합니다. 현재 시점의 식생이나 생태계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식물을 찾고자 한다면, 지상부 식생 부분을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곳의 식생 역사와 식생 변화 요인, 그리고 미래식생까지 예측하고자 한다면, 잠재 식생 연구가 좋은 방법이지요. ‘토양종자은행’은 토양 내 혹은 표면에 존재하는 생명력 있는 종자의 모임으로, 잠재 식생의 대표적인 형태입니다.
기록된 최초의 토양종자은행 실험은 진화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다윈은 식물의 확산과 새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실험을 계획했는데요. ‘물새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종자를 운송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연못의 얕은 물 속에 잠긴 진흙을 세 숟가락씩 퍼서 6개월간 실험을 한 결과, 총 537개체나 되는 식물이 확인되었죠. 단지 세 숟가락의 진흙에서 발아된 식물이 537개나 되는 것도 놀랍지만, 발아된 식물 중에는 주변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섬에서만 자라는 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윈은 종자가 멀리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물새가 진흙이 묻은 발로 습지를 돌아다닐 때, 점성이 높은 진흙에 종자가 붙어 실험 연못까지 이동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지요. 그러면서 담수 습지식생 조성에 물새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다윈의 실험처럼 습지의 토양에는 습지를 가득 메운 식물보다 더 많은 종의 식물이,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종자로 진흙 속에 존재합니다. 이 풍부하고 다양한 식물의 종자는 토양층 표면이나 흙 속에 파묻혀서, 발아하기 적합한 시기를 기다립니다. 기회가 찾아오면 재빨리 발아하여 습지의 식생을 항상 풍성하고 높은 생물다양성이 유지되도록 합니다.
◇식물 저장소인 토양종자은행
한강의 물가에 있는 토양 내에는 종자가 1㎡당 12만5,000개가 넘게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 많은 종자는 자연상태에서는 모두 발아할 수 없습니다. 발아하기 적합한 때를 기다리다가 새, 쥐, 곤충이나 토양 미생물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곰팡이에 의해 분해되어 토양 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모식물체에서 생산된 종자 중 발아에 성공하는 것은 1~3%, 이 중 성숙한 개체로 자라는 것은 1%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식물은 왜 쓸모 없는 종자를 이렇게나 많이 생산할까요?
화산폭발, 사막, 남극과 같은 환경을 떠올려 보면 짐작할 수 있듯, 식물체는 극단적인 환경의 위협이 오랫동안 지속될 경우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자는 추위, 산불 혹은 가뭄과 같은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요. 마치 ‘동면’하는 동물처럼 살아있지만 생장을 정지시켜 발아를 미루며 ‘휴면’ 상태를 유지합니다. 휴면기간 동안 씨앗 속의 싹은 단단한 껍질의 보호를 받으며 생존 기간을 연장합니다.
얼마 전 경남 함안 700년 된 지층에서 발굴된 연 씨앗을 심었더니, 꽃을 피운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연 씨앗이 오랜 기간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진흙 속에서도 휴면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물이 종자로 유전자를 다음세대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겁니다. 생산된 수백, 수천개의 씨앗 중 한 개만 발아에 성공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공한 개체는 다시 수백, 수천개의 씨앗을 다시 만들어 낼 테니까요. 1%의 성공을 위한 치밀한 진화의 전략인 것입니다.
◇진정한 투자의 고수는 미국가막사리
종자의 휴면능력은 식물의 생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탁월한 전략입니다. 휴면상태를 깨고, 씨앗이 다시 활력을 얻어 발아하는 것을 ‘휴면타파’라고 합니다. 자연상태에서 종자의 휴면기간은 수일에서 수십년까지 식물에 따라 다릅니다.
미국가막사리는 논두렁, 하천 수변부, 연못이나 저수지 주변에서 쉽게 관찰되는 국화과 식물입니다. 이 식물의 종자특성을 살펴보면 식물이 종자휴면전략을 보다 적극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꽃이 지고 난 꽃봉오리에 둥글게 종자를 생산하는 미국가막사리는 동물에 의해 종자를 널리 퍼트리는 전략(동물산포)을 사용합니다. 이 종자는 납작하고 길쭉한 몸통에 뾰족한 뿔이 두 개 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종자 전체에 거꾸로 난 털이 있어서, 동물의 털이나 옷깃에 쉽게 달라붙을 수 있습니다. 꽃받침에서 꽃의 중앙까지 가시 돋힌 종자가 둥글게 자라면, 옆을 스치는 동물에 콕 박혀 멀리로 이동합니다. 하천 산책을 하고 돌아왔을 때, 바짓단이나 소매 끝에 납작한 무언가를 떼어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쩌면 미국가막사리였을지도 모릅니다. 미국가막사리 종자의 치밀한 구조는, 근처를 지나는 이동성이 있는 생물을 모두 자신의 종자 산포자로 고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급으로!
미국가막사리 종자는 자신이 붙어있는 생물체가 어디로 갈지, 또 자신이 언제 그 생물에서 떨어져 나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꽃봉오리에서도 서로 다른 휴면기간을 가진 종자를 생산한답니다. 연구 자료에 의하면, 꽃받침에 가까울수록 종자는 통통하고, 꽃 중앙부에서 자라는 종자는 상대적으로 더 납작하고 가시도 더 길며, 가벼운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휴면기간도 종자 모양에 따라 달랐습니다. 납작하고 긴 가시를 가진 종자의 휴면기간이 통통하고 가시가 짧은 종자보다 길었습니다. 왜 일까요? 긴 가시의 종자는 동물 털 깊숙이 박힐 수 있습니다. 깊게 박힌 종자는 쉽게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 멀리 갈 수 있겠죠! 심지어 종자산포자의 수고를 생각하여 멀리 가야 하는 종자는 가볍기까지 합니다. 문제는 이동기간 동안 휴면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미국가막사리는 멀리 가야 하는 종자의 휴면기간을 더 길게 설계하였습니다. 무급의 종자 산포자의 도움으로 충분히 멀리 가서 어딘가 도착했을 때 이 잠자는 미국가막사리 씨앗이 토양에 살포시 안착하여 토양종자은행에 포함될 기회를 갖는다면, 발아율은 20%가 됩니다. 진정 투자의 고수입니다.
◇자연유지장치의 기능을 수행하는 종자은행
식물의 중요한 생존 메커니즘인 종자와 그 종자가 모여 만든 종자은행은 생태계에 시간적 혹은 공간적 식생의 저장소가 되어 생태계의 장기 안정성을 부여하는 자연유지장치 기능을 수행합니다. 또한 훼손된 생태계에 생물다양성 부여하는 원동력이며, 먹이원 등으로 활용되어 토양생태계 안정성 기여, 과거 종자를 통한 식생 역사 반영, 환경변화에 의한 식생변화 예측 등으로 그 중요성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변함없는 것 같은 주변의 식물을 자세히 보면, 환경변화에 끊임없이 대응하며, 생장을 위한 경쟁을 하고 변화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봄에 가까운 화단에 무슨 꽃이 피어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흙 속에 숨겨진 생명력을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화단의 흙을 세 숟가락 퍼서 접시에 담아 물을 뿌려가며 겨울 동안 토양 내 종자를 발아시켜 보는 걸 어떨까요. 다윈보다 많은 식물이 여러분의 접시에서 발아될지도 모르니까요.
이효혜미 국립생태원 생태평가연구실 환경영향평가팀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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