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20여 년 전 결혼해 아이 셋을 두고 있습니다. 성적에 집착하며 아이들을 때리는 남편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은 아이들이 학원 숙제를 다 못하면 새벽인데도 잠을 못 자게 하고, 숙제를 봐주다 답답하면 때리기도 합니다. 저는 성적보다는 아이들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고 싶은데 남편은 막무가내입니다.
저희 부부에게는 대학생이 된 큰아이가 있습니다. 큰아이는 참 좋은 아이예요. 흥이 많고, 사려 깊어 대인 관계도 좋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다니지는 않지만 저는 대학도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원하는 것을 배우고 익혀 자기 진로를 찾아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도 주변에서 누구 아이가 의대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앞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겠다'는 생각에 부럽기는 하지만 그냥 그게 끝입니다.
남편은 저와 달라요. 큰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큰아이의 양육을 실패로 규정 짓고는 대입 기회가 있는 나머지 두 아이에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남편은 그 뒤로 힘들기로 소문난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 매일 숙제를 잘했는지 관리합니다. 학원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일일 보고도 남편이 직접 받아요.
아이들은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놀다, 밤 늦게 허덕이며 숙제를 하고, 새벽 2~5시 사이에 잠이 듭니다. 남편은 숙제가 미진하면 '그렇게 살면 거지가 된다'는 잔소리를 1시간 넘게 하고, 공부를 가르쳐 주다가 '또 모른다'며 화를 내고 때립니다. 애들을 새벽까지 잠을 안 재우고 본인도 아침 7시가 돼서야 잠듭니다. 아이들은 밤 늦게 자니 학교에서 졸고, 그래서 선생님께 연락이 오면 또 남편이 아이들을 혼내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제가 때리지 말라고 막아서도 그때뿐, 저까지 때리겠다며 협박합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아빠가 언제 오는지 물어보며 불안해해요.
남편은 유학 시절 유치원에 데려다 줘야 하는 아이를 깜빡 잊고 차에다 5시간 방치해 아동 학대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그냥 가던 길 가지 왜 신고를 하냐'며 아이가 차에 혼자 있다고 신고한 행인을 공격하는 식이에요.
저는 어린 시절 유복한 가정에서 모범생, 착한 딸로 자랐습니다. 저희 엄마는 흔히 말하는 '헬리콥터맘'으로 통제가 심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큰 불만은 없었어요. 대학 전공도, 유학도 부모님이 원해서 선택했지만 공부가 취미라 결과적으로도 잘 맞았습니다. 지금 남편과도 여자 혼자 유학을 보내면 위험하다는 부모님 말에, 선을 봐서 반년도 안 돼 혼인신고를 했어요.
저와 달리 남편은 어렸을 때 폭력이 일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시아버지는 매우 폭력적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수시로 욕설을 해서 주변 사람들이 다 싫어했다고 해요. 남편은 어릴 때 사고를 많이 쳤고, 부모님께 거의 매일 맞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그날 맞지를 않았더니 불안해서 잠이 안 온 적도 있다는 말을 듣고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부모님 두 분 사이도 좋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성장 배경 때문인지 저희 부부의 교육관이 너무 다릅니다. 저는 친정 엄마가 너무 통제적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아이들 학원을 줄여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본인 엄마가 문제지를 매일 풀지 않으면 자신을 때린 덕에 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도 이런 상황을 버티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김하영(가명·49·회사원)
하영씨, 부모가 자녀를 잘 키우고 건강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그것은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키워 주고 어리더라도 존중해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이의 직업적 성공이나 부와 명예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고 지나치게 다그치게 되고 아이들은 공부에 시달리게 되지요. 행복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잘 키우는 걸까요.
사람은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이 있어요. 하영씨는 온순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려움도 잘 참아내는 분인 거 같아요. 엄마가 집이랑 가까운 거리도 항상 데리러 오고 '○○전공을 선택해라' '유학을 가라'고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대신하고 통제해도 하영씨는 엄마와 크게 갈등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영씨 성품도 그렇고, 엄마 말을 따랐을 때 결과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을 거예요.
우리 주변에는 자녀의 중요한 결정을 해주고 자녀가 내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부모가 많아요. 그렇게 하면 자녀가 성공하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자녀의 성장을 돕는 사랑이 아니고 과도하게 통제하는 것이지요. 부모는 자녀를 키우면서 적절한 통제를 통해서 자기 조절을 가르쳐야 하지만 지나친 통제는 자녀를 힘들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되지요. 또한 아이에게서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될 기회를 뺏기도 해요. 아이는 자라면서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실패를 책임지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영씨 어머니는 '네가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영씨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인생을 경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하영씨는 인생에서 좌충우돌하며 스스로를 찾아가는 과정을 겪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에요.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이 편안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이런 양육 방식으로 자란 아이는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이 생기고 자기 신뢰감과 자기 확신감이 떨어집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어려워하게 돼요.
하영씨도 남편을 사랑해서, 이해심이 많아서, 이 결혼 생활을 지금껏 유지했다고 보기는 힘들어 보여요. 그보다는 이 관계를 끝내겠다는 주도적인 결정을 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결단을 내리는 게 어렵고 불안하니 힘들고 괴롭더라도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낫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대학 진학과 유학은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해도 결과가 나쁘지 않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러기가 쉽지 않은 문제예요. 결혼 생활은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공부처럼 혼자서 열심히, 잘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하영씨와 달리 남편은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하영씨 남편은 부모님에게 많이 맞으며 자랐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폭력 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경험하지 못했어요. 자기 조절 능력도 부족합니다. 두 사람의 성향은 정반대입니다. 비유를 들어 볼게요. 누가 지나가다 내 발을 꽉 밟고 갑니다. 하영씨는 매우 아파서 눈물이 나지만 '이 정도 일로 내가 아파도 되나?' 하며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이에요. 반대로 남편은 본인이 누군가의 발을 밟고도 '그러길래 왜 내 발 밑에 발을 깔았어?'라고 나오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아이를 차에 놓고 내리고도 '어쩌다 깜빡할 수도 있지. 뭘 그런 걸로 신고를 하나, 그냥 지나가면 되지' '애초에 애를 차 안에 가둘 생각이 없었다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의 이런 정반대의 특성이 요철처럼 맞물려 이 결혼이 지금껏 유지된 겁니다. 안 그러면 진작에 결혼 생활이 끝났을 거예요.
특히 걱정되는 건 아이들이에요. 폭력에 많이 노출된 아이는 때로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고쳐야 하는 잘못을 했지'가 아니라 '내가 맞을 짓을 했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체벌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고 걱정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애를 때리거나 잠을 안 재우면 안됩니다. 하영씨가 보낸 사연이 가감이 없다면 이것 또한 아동 학대와 가정 폭력에 들어간다는 걸 분명히 말하고 싶어요.
하영씨, 남편을 멈추게 해야 해요. 그런데 남편의 행동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여요. 남편의 문제 행동은 결혼으로 맺어진 하영씨나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 결혼 전부터 본인이 가지고 있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더 큰 문제는 남편은 이런 행동이 문제라고 자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큰 사람이라는 겁니다. 남편은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 자기 반향 능력이 없어 보입니다. 문제라고 생각해야 치료를 받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다 애들 잘되라고 하는 거다'라고 주장할 거예요.
지금 아이들의 마음은 병들고 멍들었을 거예요. 첫째를 잘못 키웠다고 생각하는 아빠의 태도와 말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을까요.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질까요. 둘째, 셋째의 마음에는 분노가 얼마나 클까요. 얼마나 아빠가 무서울까요
하영씨, 힘을 내서 남편이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정도까지는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과 남편이 붙어 있는 시간을 줄여, 남편의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애들 공부에서 손을 떼든지, 결혼 생활을 끝내든지 양자택일하라고 하세요. 하영씨가 '애들을 괴롭히고 때리는 건 절대 용납 못한다'고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동 학대로 신고해 제3자, 공권력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남편은 내면의 힘의 균형을 맞춰줄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에요. 공권력이 개입해 남편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기숙사 학교에 보내는 방법도 고려해 보세요. 기숙사에서 또래들과 즐거운 시간도 경험하고 때리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 다른 어른들, 선생님과 이야기도 많이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민주적으로 의논하면서 가치관을 세우고 내면을 성장시키고 수면 시간과 기상 시간이 일정한 규칙적 생활을 배우도록 하는 겁니다.
아이들 문제만큼은 하영씨가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으로부터 아이들과 하영씨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어렵다면 이혼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위치에서 반드시 주어야 할 사랑이 있고 부모의 위치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하영씨가 지금 둘째, 셋째한테 그것을 하셔야 해요. 아빠가 우리를 새벽까지 재우지 않고 때리는 모습을 보고도 엄마가 자신들을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드린 여러 조언을 실행하는 것이 하영씨에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영씨,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 어떤 인생을 살면 좋을지를 의논할 수 있는 엄마로 아이들 옆에 버텨 주셔야 합니다. 하영씨 내면에 아이들을 향한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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