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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돈이 아니라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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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돈은 상징일 뿐이죠.’”
영화 ‘머니볼’(2011) 속 피터(조나 힐)의 대사
얼마 전 어느 영국인과 대화하다 야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영국에선 구경조차 하기 힘든 야구가 미국과 한국, 일본 등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점을 신기해 했습니다. 야구는 미국에서 발생했고,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곳이니 이들 나라에서 야구 사랑이 유난한 걸 거라고 답했습니다. 때마침 미국에선 영화 ‘꿈의 구장’(1989)을 재현해 메이저리그 경기가 지난 12일 펼쳐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MLB ‘꿈의 구장’ 경기…16년 만에 최고 시청률 ‘대박’). 야구는 미국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꿈이란 단어는 야구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 걸까 더 궁금해졌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꿈의 구장’을 다시 봤습니다.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지금 한국 야구가 처한 사정을 새삼 돌아보게 됐습니다.
주인공 레이(케빈 코스트너)는 미국 아이오와에서 농장을 운영 중입니다. 어느 날 옥수수밭에서 일하다가 환청처럼 낯선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올 것이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이었습니다. 처음엔 누가 장난치나 했으나 며칠이고 같은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레이는 신의 계시를 받은 듯 옥수수밭을 밀어버리고 야구장을 만듭니다. 미국 프로야구단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유명 선수였으나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승부조작을 한 혐의로 영구 퇴출된 조 잭슨(레이 리오타)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야구장을 만드니 꿈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저녁 잭슨이 야구장에 나타나고, 레이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다음날엔 잭슨이 동료들까지 데려와 야구장을 뛰어다닙니다. 그들은 야구장 외야 쪽 옥수수밭을 통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레이 가족은 유령이 된 유명 선수들이 야구장을 누비는 진귀한 장면을 즐길 수 있지만, 다른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호사입니다.
주변에선 레이를 바보 취급합니다. 옥수수를 심고 수확해 돈을 벌어도 시원치 않을 살림인데, 엉뚱하게 통장을 다 털어 야구장을 만들었으니까요. 현실은 주변에서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농장 경영은 어려워지고, 살림은 빠듯합니다. 레이는 결국 농장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 처합니다.
레이가 야구장을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30대 중반인 그는 아버지처럼 일만 하다 죽음을 맞을까 봐 두렵습니다. 레이는 “더 늙기 전에 뭔가를 충동적으로 하고 싶다”며 야구장 건립을 반대하는 아내 애니(에이미 매디건)를 설득합니다. 살림은 조금씩 안정돼 가지만 현실에 안주해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별다른 행동도 취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레이의 무의식도 작용합니다. 레이는 3세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품에서 자라면서 동화 대신 야구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화이트삭스 팬이었고, 잭슨이 누명을 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고 아들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레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레이는 보수적인 아버지와 정반대 가치관을 지녔습니다. 1960년대 진보를 상징하던 버클리대학에 진학해 아버지를 놀라게 했고, 이후 연락을 끊고 지내다 결국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야구와 화이트삭스와 잭슨은 아버지와 직결되는 단어였던 셈이니 레이는 숙명적으로 야구장을 짓고, 잭슨을 맞으려 했던 겁니다.
옥수수밭에 야구장을 지으며 꿈을 이룬 레이에게 어느 날 또 환청이 들립니다. “그의 고통을 덜어줘라.” 또 알 듯 모를 듯한 메시지에 레이는 성질을 부리지만 역시나 신의 계시 같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60년대 아내와 함께 흠모했던 운둔 작가 테렌스 맨(제임스 얼 존스)이 열쇠가 될 거라고 직감하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우여곡절 끝에 테렌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옵니다.
테렌스는 레이의 농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기한 일에 감복합니다. 레이는 농장을 팔라는 최후통첩을 받는데, 테렌스는 고뇌하는 레이에게 농장을 팔고 야구장이 없어지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몰려 올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과 함께요. 그는 선언하듯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기관차처럼 굴러 지나갔고 역사는 칠판의 글씨처럼 쓰였다가 지워졌어도 야구만큼은 시대를 초월했어. 이 야구장과 야구선수들은 우리들의 일부분이 되어 있는 거야…”
야구가 시대를 초월해 미국인들을 이어주는 단단하고도 굵은 끈이라는 주장입니다. 테렌스는 한때 야구광이었는데, 행동하는 진보지식인의 삶을 포기한 후 야구와도 담을 쌓았습니다. 그는 레이의 야구장에서 야구에 대한 사랑을 되새기고 다시 책을 집필하기로 결심합니다. 꿈을 잃은 냉소적인 인물이 야구로 옛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영화에서 야구는 미국의 꿈을 상징합니다. 레이는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입니다. 아버지 존은 메이저리그 선수를 꿈꿨지만 마이너리그를 1, 2년 전전하다 꿈을 포기합니다. 뉴욕으로 이주해 아들을 키우기 위해 생업에 몰두합니다.
영화 막바지 레이의 야구장에 젊은 존이 나타납니다. 존은 당연하게도 미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기가 천국인가요?” 레이가 “천국은 있나요”라고 되묻자 존은 “물론이죠. 꿈이 실현되는 곳이죠”라고 답합니다. 야구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던 아버지가 젊은 날 모습으로 나타나 아들이 만든 야구장에서 뛰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은 무척 상징적입니다. 아들은 돈이 아니라 꿈을 쫓아 야구장을 건립했습니다. 가난한 이민자였던 아버지의 꿈이 아들을 통해 이뤄진 셈인데, 아메리칸 드림은 곧 돈이 아니라 꿈에 그리던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돈 대신 꿈을 택한 레이는 결국 보상을 받게 됩니다.
메이저리그는 영화 ‘꿈의 구장’ 장면을 본 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뉴욕 양키스 경기를 주최했습니다. 최근 야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시들은 상황에서 팬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라고 합니다. 돈이 아닌 꿈이라는 야구의 본질을 돌아보려는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최근 일부 선수가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어긴 음주 모임으로 도마에 올랐고, 야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메달 획득에 실패하면서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차라리 무관중이 다행?…KBO리그에 엄습한 무관심 공포.)
한국인에게 야구는 무엇일까요. 시대를 가로지르며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국민스포츠일까요, 일시적인 열기로 형성된 거품이 가득한 스포츠에 불과할까요.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은 돈을 위해 뛰는 걸까요, 야구라는 꿈을 위해 던지거나 치고 달리는 걸까요.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캐치프레이즈는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낭만을, 국민에겐 건전한 여가 선용을’이었습니다. 위기 타개책은 본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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